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May 22. 2021

술 못 마시는 여자와 술 잘 마시는 남자

결혼 생활 유지 비결

난 술을 잘 못 마신다. 안 마시는 게 아니라 못 마신다. 정확히 마시면 안 되는 사람이다.  만성 B형 간염 보균자로 태어나 22살 때부터 꾸준히 병원 진찰을 받아야 했고 지금도 간염 약을 꼬박꼬박 먹고 있다. 조그만 간염약 한 알이 내 간을 지켜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항상 말씀하신다. ‘스트레스 안 받게 조심하고 술은 절대로 마시면 안 돼요. 그리고 아침에 약 먹은 게 기억이 안 나면 저녁에 한 알 더 드세요. 빼먹지 말고.’ 그야말로 난 평생 간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난 술을 잘 못 마신다. 맥주 한 잔만 마셔도 내 몸은 알코올에 즉각 반응한다. 먼저 얼굴부터 반응이 온다. 이마와 볼은 불그스름한 수준을 넘어 점점 터지기 일부 직전까지 빨개지고 턱과 목을 거쳐 손과 다리에도 어느새 빨간색 물감을 뒤집어쓴 듯 뻘겋게 물든다. 혈관이 확장되면서  숨기고 싶은 모공, 땀구멍들이 여실이 드러난다. 애써 화장한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겉모습의 변화만 있으면 다행이다. 곧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오면서 기분은 급 다운된다. 남들은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며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하는데 나는 그 반대인거다.


교사가 되기 전 건설회사에서 몇 년 간 근무했다. 그러니깐 지금으로부터 거의 15년 전이다. ‘여기 사람들은 면접 볼 때 술을 잘 마시는지도 보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회사 동료들은 술자리를 좋아했고 술을 사랑했으며 또한 아주 잘 마셨다. 상사들은 ‘회식자리도 사회생활의 연장인 거 알지? 사회생활하려면 술도 마실 줄 알아야 돼.’ 라며 말로 압박했고 그들의 눈빛은 ‘술 잘 마시는 것도 능력이다’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넌지시 던졌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상사는 곧 하늘이라 생각했다. 상사가 주는 술을 마셔야 하며 안 그러면 그들 눈밖에 나는 줄 알았다. ‘전 술 못 마셔요. 제가 간염이 있어서 술 마시면 안 돼요’라는 말은 사회생활 특히 이 회사에서는 통하지 않을뿐더러 '술은 마실수록 느는 거야. 내가 너의 주량을 늘려줄게'라는 말이 돌아왔다.


주는 대로 다 마셔보기로 했다. 남들이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기에 나도 그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기분 좋은 척을 했고 술기운을 빌려 평소에 안 친하던 사람들과도 친한 척을 했다. 한바탕 웃음 속에 허세 섞인 말들, 진지한 말들, 쓸데없는 농담들이 오갔다. 이성이 아닌 감성, 순간적인 판단만이 뒤섞여 어질어질했다. 술자리 후 혼자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서야 잠시 잊고 있었던 이성을 되찾았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사회생활에 지친 내 모습이 흑색으로 비쳤다. 술자리에서 보인 웃는 표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내 얼굴엔 쓸쓸함이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친한 척하며 말을 걸었던 사람과는 다시 어색함이 감돌았다. 어제 가진 술자리는 한바탕 꿈속에나 존재하는 실체 없는 과거처럼 느껴졌다.


회사를 그만두고 난 결심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과는 특히 건설회사에 다니는 사람과는 절대 만나지 않기로. 건설회사 특성상 술을 마실 기회가 많고 한 번 마시면 2,3차는 기본으로 이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남편은 위의 두 가지 조건에 모두 해당된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다.  


집에서 가족들과 고기를 구워 먹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나는 사이다를, 술을 좋아하는 남편은 맥주를 집어 들었다. 남편이 집은 맥주는 곧 두 캔이 됐고 어느새 세 캔째로 이어졌다. 결혼 8년 차, 우리는 여전히 술에 대해 평행선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맥주를 그렇게 마시면 배 안 불러?”

“안 불러. 밖에서 마시면 기본 1000cc는 마시는 데 뭘.”

“대체 그걸 어떻게 마셔? 난 배불러서라도 못 마시겠던데.”

“술 하고 물하곤 달라. 물이라면 나도 1000cc 못 마시지, 그런데 술은 그냥 쭉쭉 들어가. 분위기로 마시는 거지.”

“당신은 나 같은 사람 말고 당신과 같이 술 잘 먹는 사람 만났어야 했는데……”

“왜?”

“그래야 쿵짝이 맞지. 혼자 마시면 재미없잖아. 옆에서 같이 마셔줘야 술맛도 나지.”

“난 술 잘 먹는 사람 싫어. 둘 다 잘 먹어봐라. 맨날 술 먹을 텐데. 한 명이라도 멀쩡해야지.”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난 일찍 감치 잠자리에 든다. 보기 싫은 모습은 애써 안 보는 게 결혼생활을 잘 유지하는 나만의 비결이다.   


이전 26화 결혼한 나와 결혼하지 않은 친구와의 통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