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Jun 23. 2021

요리는 희로애락의 맛이다

대충하는 손맛이 맛있는 이유

요즘은 요리에 대한 접근성이 참 쉬워졌다. 클릭 몇 번이면 처음 본 요리도 쉽게 할 수 있다. 나의 저녁 식사 준비 과정은 이렇다. 먼저 머릿속으로 어떤 음식을 만들지 생각한 후 블로그나 유튜브에서 그 음식을 검색한다. 아니면 그냥 유튜브에서 요리 채널을 보다 '오늘은 이걸 해볼까' 하며 생전 안 해본 메뉴를 고르기도 한다. 사진과 영상으로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머릿속으로 맛을 상상해 본다. 그중에서 내게 어울리는 요리법을 골라 재료 준비에 들어간다.


내가 즐겨보는 음식 채널 중 <한끼식사>라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4-5분이 되는 짧은 영상 속에는 요리사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단지 그인지 그녀인지 모르는 두 손만이 왔다 갔다 분주히 움직인다. 그 손으로 그날의 주연과 조연들이 도마 위에서 변신을 하고 냄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이 어느새 하나의 근사한 요리가 완성된다. 이 채널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오직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거기에서 만들어지는 소리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마 위에서 서걱서걱 칼질하는 소리, 가스레인지 켜는 소리, 냄비에서 물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 계란 깨트리는 소리, 재료들이 어우러지게 휘리릭 젓는 소리, 기름 두르는 소리, 지글지글 볶는 소리 등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소리는 어릴 때 엄마가 요리해주던 소리같이 정겹다.


지금은 블로그와 유트브를 통해 요리법을 알 수 있다면 예전에는 요리프로그램과 요리책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어릴 때 우리 집 책장 한 구석에는 요리책 한 세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당시 ‘하선정 액젓’으로 유명한 요리 연구가인 하선정 씨가 만든 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책은 엄마가 결혼 준비를 하면서 신혼살림으로 할머니께서 장만해 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책 표지색이 꼭 새 신부를 연상케 하는 연 핑크색, 연 노란색, 하늘색, 민트색, 연 보라색이기 때문이다. ‘너는 앞으로 요리를 해야 할 운명이다. 이 책을 보면서 가족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 주거라’ 같은 의무감과 함께 그 책은 엄마에게 쥐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다행히도(?) 그 의무감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인지도 모를 때부터 그 책은 점점 변두리 구석으로 밀려나더니 엄마에겐 성가신 존재로 전락했다. 그 책은 결국 내 차지가 되었다.


총 5권이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각각 한식 만들기, 양식 만들기, 디저트 만들기, 플레이팅 하기, 음식 예절, 이렇게 5가지 주제가 각각 한 권씩에 담겨 있었다. 난 이 책들을 좋아해서 심심할 때면 꺼내 보았다. 우선 표지색이 예뻐서 눈길이 갔다. 온통 검정, 회색 빛깔뿐인 우리 집에 파스텔 톤의 책은 눈에 띄기 충분했다. 마치 우리 집과 어울리는 않는 이방인 같은 모습으로 방 한 구석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녀석들을 꺼내 들었다. 우리 집도 책 표지처럼 파스텔톤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으로 그 녀석들을 한 권씩 방안에 펼쳤다. 오늘은 마음속으로 무슨 요리를 할까?


우리 집이 멋진 레스토랑으로 변신하는 상상을 했다. 켠 듯 만듯한 불빛을 내뿜는 거실 등은 고급 샹들리제처럼 그윽한 분위기를 선사했고 평소 밥을 먹던 조그마한 상은 넓은 식탁으로 변신했다. 식탁 위에는 화려한 꽃무늬 테이블보가 올려져 있다. 화룡점정은 그 위에 멋들어지게 플레이팅 된 그릇 에 요리책 속의 음식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다.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우아하게 먹는 상상을 한다. 아~ 잘 먹었다. 오늘도 알라의 레스토랑 여행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 요리책을 보면서 어느 요리에나 필요한 준비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계량컵, 계량스푼, 계량 저울이다. 난 우리 집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존재들이 궁금했다. 우리 집에 스푼은 많았지만 계량스푼은 없었으며, 컵은 많았지만 계량컵은 없었다. 몸무게 재는 저울도 없던 시절 계량 저울은 생소하기 그지없는 도구였다. 우리 집에 없는 이 도구들의 용도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나온 모습이 정답이라고 믿고 자랐던 나는 요리책에 나온 도구와 요리법도 정답이라 믿었다(나는 진정한 교과서 공부의 폐해자다). 어떻게 우리 엄마는 이 도구 없이도 요리를 척척 해낼까?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왜 계량스푼, 계량컵으로 요리 안 해?”

“그거 없어도 돼. 요리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그걸 언제 거기다 대고 일일이 재고 그렇게 해. 그냥 대충 양념 넣고 맛보고 부족하다 싶으면 또 양념 넣어서 맛보고 그렇게 그냥 대충 손맛으로 하는 거지.”


엄마의 대답 속에는 '대충'과 '손맛'이 자주 등장했다. 엄마들에겐 계량스푼과 계량컵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대충대충 양념을 넣어 버무려 완성된 , 바로 손맛이다. 손으로만 하는데도 음식 맛은 한결같다. 언제 어디서 먹어도 ‘이거 엄마가 만든 거네, 이건 엄마가 만든 게 아니네’가 단번에 느껴졌다. 엄마들마다 손맛이 다른 걸 보니 음식은 단순히 양념들끼리 섞인 맛이 다가 아닌 모양이다. 아마도 음식 속에는 만든 사람이 세월 속에 느낀 희로애락도 함께 버무려지는 게 아닐까. 희로애락의 비중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희’가 더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애’가 더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느 새 재료들과 조화를 이뤄 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고유의 맛을 선사한다. 거기에 가족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성과 사랑도 듬뿍 들어가니 엄마의 '대충대충' 손길이 거친 음식이 전문가의 음식보다 더 맛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혼초 요알못(요리를 알지 못하는) 시절 레시피대로 요리해 보겠다고 엄마가 사용하지 않았던 계량컵, 계량스푼, 계량 저울을 샀다. 아직 엄마가 발휘한 '대충대충 해도 맛있는 음식 만드는 법'을 몰랐기에 도구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그걸 정확히 사용하면 음식에서 전문가의 맛이 느껴질 줄 알았다. 결론적으로 지금 그들의 행방을 모르는 걸 보니 그 맛도 내 머릿속에 각인되지 않은 모양이다. 결국 지금 나도 엄마처럼 대충 하는 손맛으로 요리하고 있다.


그저께 오징어를 사서 온갖 야채를 넣고 오징어 볶음을 했다. 양념은 예전 동태탕 키트에 딸려 온 양념이 남아 있길래 그걸 넣었다. 고추장, 고춧가루, 마늘, 간장 등의 기본 베이스가 되는 양념에 음식점 주인의 손길을 거쳤으니 내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을 것 같았다. 아뿔싸! 그런데 맛이 이상했다. 부족한 양념을 더 채워 넣었다. 하지만 예전에 내가 만든 오징어볶음의 맛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주부 경력 9년 차인 나에게도 엄마처럼 손맛이 생긴 모양이다. 내 삶의 희로애락이 담긴 손맛은 어떤 모양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전 28화 7살 아들의 최애곡 <한동안 뜸 했었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