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삶에 대한 때 이른 고찰
휴직 중인 동료 두 명을 만났다. 서로가 서로의 전임과 후임으로 얽혀있는 우리는 벌써 몇 해 동안 마음을 나누고 있지만 사실 그냥 동료로 스치는 사이였다면 결코 친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성향이 다르다는 말이다. 정말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도 밥 한 번 먹는데 1년이 걸린다는 Y와 이런 거 정말 못 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부동산 계약이나 세무 업무까지 야무지게 해내는 K.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우리들의 관계성이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한 매듭으로 거듭난 데에는 같은 직장에 몸을 담고 있는 워킹맘이라는 공통점이 한몫한다.
아이들 육아고민부터 재테크, 대출이자까지 대화가 주제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가운데 아무래도 우리의 수다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직장’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퇴직 및 퇴사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이다. 10월 말에 명예퇴직을 한 전 직원은 부동산 중개사 자격증이 있어 개업을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들었다. 그전에 시보를 떼자마자 퇴사한 9급 신규 직원은 더 늦기 전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겠다고 했단다. 또 올해는 해양수산 직렬의 신규 공무원들의 퇴사가 특히 눈에 띄었는데 달러가 상승하면서 외국의 선원으로 일을 하며 받을 수 있는 연봉이 높아져 그쪽으로 인력이 유출되는 것 같다고 한다. 이미 특정한 자격을 갖추었거나 갖추기 위한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회사를 떠났다는 뜻이다.
Y는 일을 쉬는 동안 심신의 수련을 위해 새벽마다 요가를 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동네 도서관에서 타로카드를 배우고 있다면서 혹여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타로 사주를 봐주는 일을 하면 어떨까 싶다고 했다. 자유롭고 맑은 영혼을 소유한 그녀가 히피풍의 옷을 입고 타인의 타로 카드를 풀이해주는 상상을 하니 퍽 잘 어울릴 것 같았다. K는 우쿨렐레를 배우고 있고 내년에 만날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하느라(퇴사는 아니다)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 둘 다 직장에 다니고 있는 나보다 더 바쁘게 시간을 쪼개 쓰고 있었다. 직장에 매여있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출퇴근하는 것 이외에 자신에게 어떠한 새로운 자극도 전해주지 못하고 있는 나는 고여있는 물이었다. 흘러들어오지도 흘러나가지도 못한 채,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사실은 부패하고 있는지도 모를.
중앙도서관에서 ’두근두근 내 인생‘ ’ 바깥은 여름‘ 등 자기 이름 앞에서 훈장처럼 빛나는 책들을 집필한 김애란 작가의 북토크가 있었다. 학생과 교직원,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인 데다 상시학습 시간까지 인정해 준다 하니 참석을 마다할 이유가 없어 일찌감치 신청을 해 둔 참이었다. 북토크가 끝난 뒤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을 하기 위해 근무상황신청도 이미 결재를 득해두었건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까지 처리해야 급한 업무 몇 가지가 갑자기 생겨버린 것이었다. 그중 두 가지는 오전 중에 마무리를 했는데 하나가 걸렸다. 무려 김애란 작가님인데, 다른 데도 아니고 회사 내에 준비된 북토크인데 이대로 포기하는 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일단 가자.
북토크는 예상대로 좋았다. 작가님이 쓴 책 4권(두근두근 내 인생, 비행운, 바깥은 여름, 잊기 좋은 이름)을 읽을 만큼 애정 하는 김애란 작가님을 실제로 보는 것도, 책의 일부들을 발췌해 강연에 녹여낸 것도, 질의응답 시간에 나온 유의미한 질문과 정성 어린 작가님의 대답까지 모두 다 완벽했다. 마지막으로 참석자들을 위한 작가님의 사인회가 준비되어있었고 혹시 몰라서 챙겨간 작가님의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사인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줄이 너무 길었다. 남겨두고 온 일 때문에 사무실에 다시 들어가 봐야 한다는 마음과 다시없을 기회인데 기다렸다 사인을 받자 하는 마음 사이에 충돌이 일었다. 그러나 행정업무 짬밥이 어느 정도 쌓인 나의 이성은 기다리고 싶다는 감정을 가볍게 밀쳐내고 몸을 이끌어 줄을 서는 대신 운전대를 잡게 했다.
한 시간쯤 후에 북토크에 함께 참석했던 Y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금 사인받았다고. 마침 나도 일을 다 마친 때였다. 사인을 받지 못한 아쉬움과 일을 처리한 후의 후련함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오늘 처리한 일은 새로 구입한 공용차량(대형버스)의 보험을 가입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차량등록이 가능하고 운행도 할 수 있다. 보험 가입이 하루 늦는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절차가 완료되어야 다음이 진행될 수 있기에 일을 미루기가 싫었다. 보험청약서를 받아 내부기안을 하고 보험료를 결제함으로 보험 가입이 완료되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아니지만 맡은 일이기에 해야만 하는 게 행정이다. 공직에 들어와 행정업무를 맡은 지 9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동안의 행정처리 경험들은 지금의 회사를 제외하고는 도무지 그 쓰임새를 찾을 수 없다. 경력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경력직 이직은 그림의 떡이고, 그들이 사는 세상에 속한 일일 뿐이다.
퇴사 혹은 퇴직은 형체는 있는 듯 하나 잡으려 하면 흩어지는 안개와 같다. 나를 둘러싸고는 있지만 잡을 수 없어 자연스럽게 걷힐 때까지 그 속을 그저 걸어가야 하는 안개 말이다. 나에게 안개는 어쩌면 교직원공제회에서 받은 대출금일 수도 있겠다. 회사를 그만두는 시점에 일시 상환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 적어도 10년은 회사에 다녀야 할 동기가 충분하다. 안갯속을 걸을 때 그냥 땅만 보고 걷기보다는 노래도 부르고 어깨춤도 추면 조금 덜 지루하듯이 남은 회사 생활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활력소를 찾는 일이 시급하다. 그게 퇴직 후 제2의 인생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거라면 금상첨화이겠다. 쨍하게 빛나는 태양은 안개가 걷히고 나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