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곡과 쭉정이
[일반직공무원 인사발령 알림(2022. 9. 7. 자 및 9. 19.자 신규임용)]
[일반직공무원 인사발령 알림(2022. 9. 13. 자 및 9. 14.자 의원면직)]
[일반직공무원 인사발령 알림(2022. 9. 27. 자 신규임용)]
[일반직공무원 인사발령 알림(2022. 10. 1. 자 의원면직)]
9월 한 달간 2건의 신규 임용 공문과 2건의 의원면직 공문이 시달되었다. 조직이라는 곳이 원래 사람이 들고 나는 곳이긴 하지만 공무원의 경우 별도의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절대적 시간과 비용, 그리고 공무원이 되고 난 후의 직업적 안정성 때문에 사표를 내고 싶다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실제로 사표를 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튜버로 대표되는 1인 미디어의 성장과 함께 몇 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퇴사의 바람은 파이어족의 등장으로 상승세를 타더니 점점 더 강한 세력을 형성해 가는 모양새이다. 내가 속한 조직 역시 '휘청'까지는 아니지만 '흔들'리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회사를 떠나는 이의 뒷모습에 퇴사의 이유들이 꼬리표처럼 길게 이어지기도 했다. 적응을 못해서, 의지가 약해서, 일머리가 없어서...... 그러나 이는 남겨진 자들의 자기 위안일지도 모르겠다. 떠나는 이들은 침묵했으므로. 사람의 속을 내시경 보듯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인 데다 개인의 성향과 처한 상황에 따른 결정이었을 테니 다른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최근에 퇴사하는 사람들의 직급이 '서기보' 즉 입사한 지 1-2년 이내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는, 그녀는 왜 회사를 떠날까? 처음 공무원이 되었을 때 느꼈을 안도감과 성취감을 뒤로하고 말이다.
퇴사를 앞둔 A에게 메일을 보냈다. 같이 밥 한 번, 차 한 번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어디서든 승승장구하길 바란다고. 그가 더 좋은 자리에 경력채용으로 지원해서 가게 되었다는 것을 소식을 동료로부터 전해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둔 또 다른 직원도 육지의 공기업에 취업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잘 된 일이라고 진심으로 그들의 앞 날을 축복하면서도 실체가 흐릿한 우울감으로 발 밑부터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 같았다. 능력 있는 알곡들이 떠난 자리에 쭉정이가 되어 남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시험으로만 합격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특정 자격이 필요한 직렬도 있지만 행정업무는 정해진 과목을 공부하고 일정 점수만 넘으면 정년이 보장되는 직업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점의 그늘에 가려져있던 단점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바로 '전문성 부족'. 특별한 능력을 요하지 않는 일이란 그 일을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이고 결국은 꼭 내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회사에서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자리는 없다.
가히 전문가의 시대라 할 만하다. 변호사 한문철 씨는 교통사고 전문가이고 유튜버 햇님 씨는 먹는 방송으로 전문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1990년 생 박새롬 씨는 인공지능 알고리즘 전문가로서 서른 살에 대학교수가 되고 이듬해엔 최연소 카카오 사외이사가 되었다. 한 달에 한 번은 방문하게 되는 미용실의 원장님도, 손맛 장인 단골 식당 사장님도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는 전문가들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떠밀려 마흔까지 왔다. 과연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을까?
- 도배 자격증 공부하면 어떨까?
- 나도 그 생각해봤어.
최근 퇴사 이슈를 화제 삼아 나눈 동료와의 대화 일부이다. 공무원으로서 보람과 자긍심은 흐릿해지고 불안과 회의감이 선명해질 때마다 제2의 직업을 갖기 위해 (퇴직 이후에라도)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주중에는 회사 일에, 주말에는 육아에 온 에너지를 쏟다 보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은 현실의 무게에 눌려 바짝 몸을 낮춘고 만다. 이 또한 실천력 부족한 자의 뻔한 핑계일까?
자격증을 앞세워 자랑할 만한 기술은 아니라도, 잘 생각해보면 나도 잘하는 것들이 있다. 아침잠이 무지하게 많은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지각없이 출근을 하고 매일의 일과를 무리 없이 소화해낸다. 상사의 지적을 유연하게 받아들여 내 자존감을 보호하는 것, 이 자료를 받아 대체 어떤 정책을 만들겠다는 것인지 의문이 드는 국회의원 요구자료도 충실히 작성하는 것 또한 내가 잘하는 일들이다. 잘하는 일들을 나열하다 보니 나는 내 직업과 제법 잘 어울린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패배감에 무기력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내가 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알곡이 되면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