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어르신'의 독백-7
어쩌다 갑자기 한 주일 간 아내와 떨어져 나 홀로 지내게 됐다. 아내가 미국 코네티컷에 살고 있는 딸과 함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예정에 없던 '모녀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원래는 아내와 함께 9월 초에 그리스 에게해변에 살고 있는 사돈댁을 열흘정도 방문할 예정이었다. 오래전에 사돈댁에서 우리를 초청했는데 이사문제 등으로 2년여 미뤄오다가 이번에 방문하기로 했던 것. 그런데 항공권 예약 등 여행일정을 구체적으로 결정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 갑자기 왼쪽 무릎에 걷기 불편할 정도의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편치 않은 상황에서 무릎까지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아내가 딸한테 내 이야기를 전한 모양이었다.
여행 좋아하는 딸이 내 소식을 듣자마자 아내한테 '아빠대신 모녀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게 되었다. 무릎 아픈데 여행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인 데다 나 때문에 갑자기 계획이 틀어져 아내한테 미안한 입장이 되었으니 내가 모녀여행을 반대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갑자기 우리 부부의 그리스 여행계획은 취소되고 그 대신 아내와 딸이 한 주일 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여행을 가게 됐다. 우연의 일치로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 살고 있는 아들내외는 프랑스로 여행을 가고 사위는 로스앤젤레스로 비즈니스 출장을 떠났다. 결국 가족 모두 각자의 집을 떠나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나만 혼자 집을 지키는 신세가 되었다.
이민 와서 이제까지 아내하고 떨어져 지낸 건 딱 한 번이다. 20여 년 전 아내와 딸이 일주일 간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래도 그때는 아들이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상황이어서 아내는 없지만 나 혼자 집을 지킨 것은 아니었다. 또 당시만 해도 내가 비교적 젊은 나이인 데다 일을 하던 때라서 아내의 부재가 나의 일상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은퇴하고 거의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생활패턴이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쇼핑을 가거나 성당에 가거나 지인들 모임에 가거나 할 때 대부분 함께 행동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 없이 나 혼자 살아가게 되니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매사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아내가 집안일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아내의 부재로 인한 어려움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
우선 심리적으로 무척 힘들다. 아내가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외출하여 나 혼자 집을 지키고 있어도 혼자라는 느낌을 가져보지 못한 채 지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집안 어느 공간에 있든, 집에서 무슨 일을 하든 혼자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갑자기 혼자 살아가다 보니 평소 같으면 별것 아닌 일에도 걱정이 앞서고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갑자기 몸이 아프면 어쩌지? 하는 등의 불안감이 수시로 엄습하는 것이다. 매일같이 식탁에 둘이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해오다가 혼자 끼니를 챙기게 되니 청승맞은 홀아비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평소 둘이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게 소소하지만 얼마나 행복한 일상인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얼마 전 아내의 대학 후배 한 사람이 아내의 여행계획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더러 '나이 든 남자들이 혼자 집에 있게 되면 분리불안증상을 보인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하고 물어왔었다. 막연히 괜찮을 것이라고 대답했는데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외로움 그리고 불안감이 바로 그런 증상 아닌가 싶기도 하다.
수년 전 신문 칼럼을 쓰기 위해 부인을 떠나보내고 혼자 살고 있는 노인을 집으로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캐나다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은퇴한 노인이었다. 당시 그분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하고 비슷했었다.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며 그분이 이렇게 말했다. '나 혼자 살려니 너무 외로워...'라고. 그분의 목소리는 힘이 빠져있었고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이 얼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남자노인이 혼자 산다는 게 얼마나 외롭고 힘든 일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분을 만났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비록 일주일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지만 혼자 살아간다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는 사실을 새삼 절실하게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의 빈자리가 이렇게 크리라고는 몰랐던 것이다. 오늘 아내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제발 나보다 오래 살아달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