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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암환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건

아버지를 간절히도 살리고 싶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왔다.
지하 5층까지 만차인 걸 보니 우리나라에도 아픈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아기가 있는 나와 사랑하는 손녀가 있는 아버지는 코로나 시대에 대학병원에 가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KF94 마스크를 쓰고 뒤에 고리까지 확실히 걸어 잠갔다. 한번 잠긴 마스크는 진료를 받고 응급실에

가서 아버지 폐에 차신 물을 빼느라 대기를 하고 조치를 받는 12시간 동안 열리지 않았다.

이미 왼쪽 폐는 기능을 하지 못할 만큼 암이 퍼졌고, 그나마 남아있던 오른쪽 폐에 물이 차는 상황.

우리를 지켜주던 KF94 마스크.

건강한 사람도 하루 종일 KF94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숨이 차고 머리가 어지러운데 간신히 숨 쉴 만큼 남아있는 폐로 혹시나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손녀에게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을까 아버지는 단 한 번에 짜증 없이 묵묵하게 마스크를 쓰고 계셨다.

코로나 시대 폐암 환자로 는 건 가혹했다.


여름이 완연했던 8월의 하늘.

여름이 완연하던 8월.

아버지가 갑자기 숨을 쉬기 힘들시다며 공기 좋은 곳에 계시고 싶다고 내려가신 강원도에서 올라오셨다.  

하지만 코로나가 잠식되지 않은 지금 폐에 차신 물을 빼기 위해선 무조건 응급실로 가야 했다. 응급실 문이 열리자 코로나 방역복을 입고 열을 재기 위해 수고하시는 의료진이 눈에 보였다. 같이 들어가려 하자 혹여 아이가 있는 내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에 노출될까 봐 집에 가서 있으면 끝나고 전화 주시겠다는 아버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웃으며 괜찮다 괜찮다 하시며 응급실로 들어가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병원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아직 안 갔어? 예쁜 딸 아빠 괜찮으니깐 어서 집에 가있어. 밥은 먹었어? 배고프겠다. 어서 가서 밥 먹고 집에 있으면 끝나고 전화 줄게."


눈물을 흘리며 집에 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무거웠다.

아버지와 함께 병원 갈 때는 아침을 알리는 오전 8시의 초록 초록한 공기를 맡으며 갔는데, 응급실 들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봤던 오후 2시를 지나 집에서 아버지의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 노을이 지고 어느새 캄캄한 밤이 찾아왔다.

'징-징-"

드디어 기다리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이제 끝났어. 예쁜 딸.  아빠 흉관 잘 삽입했어. 오빠가 와서 맛있는 저녁 사준다네.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폐에 물을 빼는 흉관을 삽입하느라 하루 종일 식사도 하지 못하신 아버지의 다소 힘없지만 애써 웃어 보이려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아침에는 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주셔서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갈 수 있지만 아기를 도맡아 재우는 밤에는 내가 아버지를 케어할 수 없어 오빠가 아버지를 모셨다. 오빠가 사준 복지리가 너무 맛있다는 아빠의 목소리 마음에 안심이 됐다.

이렇게 힘든 일이 있을 때 나 혼자가 아니라 오빠와 함께여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함께 챙기고 서로 수고했다 말하며 슬픔을 몫을 나눌

누군가를 부모님이 나에게 주셨다는 것.

그것도 든든한 오빠주셨다는 게 참 의지가 되었다.


흉관을 삽입하고 일주일 후 얼마큼 폐에 물이 빠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대학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들어가기 전 코로나 질문서를 휴대폰으로 작성하고 입구에서는 손소독제로 손을 닦고 열 감지 카메라를 통과해야지 병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종양 내과'로 향했다.
암환자는 오자마자 지난 진료 때 받은 접수증의 바코드를 기계에 스캔해서 접수를 하고,  키와 몸무게를 재야 했다.

많은 아픈 사람들이 앉아 있는 이곳에서 다시금 건강의 소중함에 대해 알게 된다.
일상에 찾아온 귀찮음으로
제대로 되지 않은 식사를 하고, 운동을 게을리한다.
하지만 평생 써야 하는 몸이기에 조금 더 돌보는 것이 맞다.
다시금 깨닫는다.

아버지가 폐암인걸 아시게 된 건 러시아로 태권도를 가르치러 가시기 위해서 검진을 받으셨는데 폐에 무언가 있다는 소견을 받고 나서 서둘러 대학병원에 가시게 되셨다고 했다.


나의 아버지는 태권도 9단으로 태권도 관장님으로 평생을 사셨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유치원을 큰 곳으로 분양받으시면서 이사장님으로 계셨었다. 그렇게 난 자상하신 부모님과 넉넉했던 집안 환경에서 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영원할 것 같던 행복은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 깨져버렸다.

갑자기 유치원 운영이 어려워지게 면서 부모님은 정들었던 유치원을 정리하시게 되셨다.
설상가상으로 정리하신 모든 금액을 아시는 분의 소개로 땅에 투자를 하셨는데, 그 땅이 정권이 바뀌며 그린벨트로 묶였고 우리 집은 갑자기 가난 속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쌀에 간장만 먹을 만큼 가난한 시절을 겪게 되면서 아버지는 갓 20살이 되는 자식들을 대학교에 보내시기 위해 일용직 노동자로 일을 하셨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입원하시게 되었고, 오빠는 군대를 가게 되었다.

그 힘든 시절 동안 아버지와 나는 작은 집에서
'괜찮다 괜찮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서로를 다독이며 견뎌냈었다.


내가 스무 살 무렵 파리바게뜨에서 아르바이트했던 시절엔 사장님께서 전날 남은 빵을 봉지에 싸주셨는데 그 빵으로 식사를 대신하곤 했다.


그 힘든 시절에 아버지는 나에게
"우리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파리바게뜨에서 빵 마음껏 사서 먹자."
며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었다. 


그 순간. 마음속에 드는 한 생각이 있었다.

'내가 잘 성장해서 고생하신 우리 부모님 호강시켜드려야겠다.'

는 생각. 그때 그 생각은 내 삶의 원동력이 되었고, 부모님은 나의 삶의 이유가 되었다.

인생의 고난의 시간을 웃으며 담담하게 아버지와 보내면서 아버지와 나는 더욱 애틋한 사이가 되었다.


파리바게뜨 빵을 마음껏 사 먹던 날.

"우리 참 성공했다. 파리바게뜨 빵도 마음껏 사 먹고."

눈물이 고여 미소 짓던 아버지의 말에 눈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던 날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내가 부모가 된 지금.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IMF를 겪었던 그 시절 부모님들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겠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 자식들이 있기에 치혈하게 살아남아야 했던 그 참담하지만 간절했을 삶의 무게를 내가 가늠조차 할 수 있었을까.

모든 걸 포기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는데도 태권도로 단련되신 아버지의 강인한 정신력으로 아버지는 늘 우리 곁에 든든한 뿌리 깊은 나무로 버텨주셨다.
눈물로 나무가 되신 나의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와 오빠는 마치 가난이란 걸 겪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반짝반짝 예쁘게 열매를 맺게 되었다.

아버지 그 고난의 나락에서 전업을 하시게 되셨고, 기업체 강의를 나가시게 되었다. 그렇게 1시간에 100만 원을 받는 명강사가 되셨다.
나는 천직인 항공사 승무원이 되고 행복하게 비행하며 과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오빠도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훌륭한 기업의 과장이 되었다.
그렇게 우린 아버지의 눈물 나는 사랑으로 험난한 사회에서 잘 자리 잡게 되었다.

아버지가 연세가 드시고, 강의 시장도 세대교체가 되었기에 더 나은 목표를 위해 러시아행을 선택하셨지만 '암'이라는 무서운 병 앞에 날개가 꺾이고 마셨다.


아버지는 어머니 임신을 하는 동시에 담배를 끊으셨고, 그 시절부터 암에 걸리신 61세가 되시기까지 담배를 태우 신적이 없었다.
평생을 본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시는 것을 보지 못했을 만큼  술도 절제해서 드셨다.
늘 건강식을 드시고 늘 운동은 생활화하셨다.
그런 분이 폐암이라니-
아버지께서도 폐암 1기라는 소견을 듣고 나서도 믿기지 않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보다 본인 몸을 잘 챙기셨던 분이기에

폐암의 특성상 암이 진행되기까지 증상이 거의 없고, 조기에 발견하기 어려운 암인 만큼 1기 때 발견한 건 천운이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폐암은 1기 때 수술해야지만 완치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술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택하신 길은 '자연 치유'셨다.
자신이 어떻게 챙겨 왔던 건강인데,  
건강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자연 치유를 위해 공기 좋은 곳으로 내려가셨고 뜸 치료와 효소 치료를 시작하셨다.

그 당시 나는 임신 상태였고 아버지는 임신 중인 내가 충격을 받을까 봐 암 발병 소식을 알리지 않으셨다.
딸 바보 아버지가 만삭이 되어도 공부하시는 것이 있다며 찾아오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이상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지만, 무언가 시작하시면 끝을 보시는 성격이시기에 아버지의 공부를 응원하고 있었다.

아기를 낳고 몸을 추스 어느 날.

오빠가 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폐암에 걸리셨어."
"아빠가 폐암에? "

"응."

오빠의 한마디에 눈물 뚝 흘리고 있는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오빠는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다독이고 있었다.
자식인 우리들도 이렇게 안 믿기는 상황인데 본인은 어떠셨을까.


하지만 현실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살려야 했다,


 강원도로 내려가신 아버지께 화상 통화를 걸어 폐암은 1기 때만 수술로 완치될 수 있다고, 지금 당장 수술하셔야 한다고 3개월이 된 아이를 아기띠로 안고 재우며 울고불고 설득을 했지만 고집이 세셨던 아버지는 완강히 거부하셨다.

어머니에게 아기를 맡기고 강원도에 오빠와 내려가 설득했지만 그 또한 완강히 거부하셨다.

 수술 또한 위험 부담이 있고, 암은 언젠가는 재발한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아빠를 살려야 하기에 병원에 발병 후에 암이 얼마큼 커졌는지 검사는 필요하다고 아버지를 설득시켜 서울로 올라오시라고 울며 말씀드렸다.
아기를 어머니께 맡기고 찾아간 병원 앞에서 아버지는 우리 얼굴을 보시고 앞으로도 병원에 가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러 오신 것이라고 하셨다.

인생을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하신 적이 없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이시기에 자식인 우리들은 단 한 번도 아버지 말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완강하신 아버지의 모습에

'정말 자연치유가 답인 걸까.'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어쩌지.'
라고 고민하던 찰나 췌장암으로 어머니를 떠나보낸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내 상황을 듣고 말했다.


"지금 병원 모시고 가지 않으면 너 평생 너희 아버지 얼굴 보고 싶어도 못 봐.  평생.'

그 순간.
나는 이성을 내려놓고 마치 미친 사람 마냥 아버지의 가방을 질질 끌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사랑하는 자식이 불속으로 뛰어들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버지도 목숨 걸고 막을 거잖아요. 나는 아버지 살려야 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든 말든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내 아버지를 살려야 했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아버지를 끌고 병원에 들어갔고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과 같이 이성을 잃고 울부짖는 딸을 보고 아버지는 그제야 고집을 꺾어주셨다.

CT 검사 기다릴때,  방사능 나온다고 늘 나에게 멀리 떨어져 있으라던 아버지.


그렇게 아버지는 5일 동안 병원에 입원하시며 암환자가 받아야 하는 CT, MRI 등 다양한 검사를 받으셨다.
담당 교수님이 수술받으실 수 있을 것 같다고 빨리 진행해보자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께도 수술 잘될 거니 걱정하시지 마시라고 안정시켜드렸다.

하지만 모든 검사가 끝난 후 담당 교수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든 걸 놓아버리게 만들었다.

"수술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는데, 모든 자료를 취합해 보니 안타깝게도 폐막에 전의가 되었네요.
유감스럽지만 아버님은 지금 폐암 4기입니다."

체념한 듯한 아버지의 얼굴과
눈물이 앞을 가려 교수님을 쳐다볼 수도 없이 흐느껴 울던 나.

그렇게 나와 아버지와의 이별의 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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