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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피킹글리쉬 Oct 27. 2020

뭣이 중헌디? 발음에 목숨걸지 마라

영어인가 파키스탄어인가...

"애니 @*^$#@?"

"Pardon?"


"애니 빠뜨롤?"

"Excuse me?"


...........


"애니 빠뜨롤?"

"Sorry, I can't understand you. Could you say that again please?"



대여섯번의 Sorry가 오고 간 후에야, 나는 겨우 점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파키스타니의 영어를 알아들은 건 아니었다. 바디 랭귀지 덕분이었다.







사진 출처 Unsplash @zibik


영국의 상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백인 영국인"이 캐셔를 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 지역들이 있다. 특히 런던은 워낙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곳이라, 동유럽 이민자들이 캐셔를 하는 곳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학교가 위치한 곳은 런던의 5존. 런던은 중심인 1존부터 2존, 3존 차례로 외곽 지역까지 총 6존이 존재한다. 그리고 내가 살아갈 동네에는 파키스타니가 많아 보였다.



런던에 도착해서 공항과 기숙사를 제외하고 처음 간 곳은 다름 아닌 "Tesco Express". 우리나라로 치면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다. 대규모 마트에서 편의점 규모 정도로 작게 낸 점포. 규모는 작았지만,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주유를 할 수 있는 주유소가 함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는 "와, 영국 마트에는 주유소도 같이 있네. 신기하다."라고만 생각했다.



한 바퀴 다 둘러보는 데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당시 남자친구였던 현재의 신랑에게 들었던 Irn Bru란 음료수(환타 오렌지와 비슷한 느낌의 탄산음료) 한 캔, 그리고 밀딜 (meal deal, 샌드위치+감자칩+음료를 묶어서 파는 런치세트)을 들고 캐셔에 줄을 섰다. 이 때는 몰랐다. 나에게 멘붕의 시간이 올 것이란 걸.



드디어 계산할 차례. "Next Please." 란 소리에 앞으로 나아갔다. 점원은 그 흔한 Hello 도 하지 않고, 바로 스캔 모드.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애니 &*%^#$%@#?"


순간.... 얼음.



뭐지.... 무슨 말을 한 거지?



"Sorry?", "Pardon?", "Excuse me?", "Could you say that again please?" 를 여러 번 반복한 후에야, 점원은 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영국에는 이러한 작은 규모의 상점에서도 주유소가 함께 딸려 있는 곳이 많았고, 점원은 나에게 주유를 했냐고 묻고 있었다.



"Any Petrol?"



아......... 자차가 없어서 더욱 더 안 들렸던 탓도 있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영국에선 주유소를 Fuel station 혹은 Petrol station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참고로 미국에서는 주유소를 Gas station이라고 부른다.)






 



사진 출처 Pixabay @PublicDomainPictures


공항에서 심사도 무사히 마쳤고, 공항 인포메이션 센터에서도, 지하철 역에서 학생용 Oyster Card (영국의 교통카드)를 만들 때도, 알아듣지 못해 당황하는 일은 없었다. 막상 영국 땅에 도착해 사람들과 대화해보니 '영국식 영어, 생각보다 별 거 아니네.'란 생각이 들었다. 미국식 영어에만 익숙해있어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걱정을 괜히 했다 싶었다. 자신감이 다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한국에서 20년을 나고 자란 나에게 영어는 "언어"였다. 하지만, 다양한 컨텐츠로의 접근이 어려웠던 그 시절, 내가 귀로 듣고 자란 영어는 "미국인들이 사용하는 미국 영어"에 불과했다. 물론, 어렸을 때 일본인 친구들과 홈스테이 교류를 하면서, 일본어가 안 될 땐 영어를 섞어 써가며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었다. 그래서 일본인의 영어 발음에는 익숙했다. 그리고 영어가 세계 공용어이기 때문에 다양한 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한다는 사실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닥친 현실은 사실 충격적이었다. 이민자들의 나라 영국에서 백인 영국인의 정통 영국식 영어 발음을 듣는 것은 지하철, 버스, 혹은 학교에서 정도였다. Tesco Express의 파키스타니 점원의 영어 액센트는 너무 강해서, 이게 영어인지 파키스탄어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사진 출처 Pixabya @Alexas_Fotos


영어는 대부분 영어권 나라에서 사용하지만, 영어권 국가 출신 사람들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세계가 점점 일원화되고,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영어로 대화를 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이민자의 나라 영국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그래왔다.



한국인이 영어로 말하면, 한국인 특유의 악센트가 베어나온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말할 때도 그들의 악센트가 베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양한 인종의 영어 발음/악센트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영어" 자체만 잘 한다고 능사는 아닌 시대가 되었다.



반기문 총장의 영어 연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발음의 좋고 나쁨으로만 영어 실력을 평가한다면, 반 총장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발음이 좋다고 해서 "영어를 잘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반 총장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영어라는 언어를 이용해 정확하게 전달한다. 영어권 국가의 외국인이 반 총장의 연설을 듣는다면, 'He speaks English well.'하고 말하지, 'His pronunciation is really poor.' 라고 하진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누군가가 영어로 말을 하면 발음이 좋은 지부터 따지고 든다. 발음이 자신이 평소 들어온 '미국식'이 아니라면, 이내 '너 발음이 그게 뭐냐?'하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반 총장의 경우에서 보여지듯, 영어 실력에 '발음'이 다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미국인 혹은 영국인과 같은 백인이 말하는 영어만 잘 알아듣는다면, 그 사람의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까?



영어를 말함에 있어서 발음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발음이 어느 정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맞다. 단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너무 생뚱맞은 발음만 아니라면 영어 발음에 목숨걸 정도로 발음이 중요하지는 않다는 의미다. 영어는 언어다. 뜻이 통한다면, 발음은 나중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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