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즐겨라! 누구나 할 수 있다
"엄마, 오늘은 엄마 보고 싶은 영상 하나 보게 해 줄게. 뭐 볼 거야?"
"음... 나는 Free Rein!"
요즘의 일상이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과 함께 영상을 시청한다. 이제 영어가 익숙함으로 자리잡은 아이들에게, 넷플릭스를 시청하는 시간은 자유/휴식시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어를 거부하는 둘째 때문에 영어 영상은 커녕 영어책 한 권 읽어주는 것도 고역이었으니까.
신랑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20년 평생 영어권 나라에는 단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토종 한국인이었다.
지금은 영국인 신랑과 살고 있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영어는 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지만, 내가 신랑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영어권 나라에는 단 한 번도, 발도 들여놓지 않은 100% 순수 한국인이었다는 사실. 나와 신랑은 온라인 채팅을 통해 만나게 된 사이. 그 당시 나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이... 그럼 그렇지.... 신랑을 만나고 나서 계속 영어로 대화를 하니까 영어실력이 향상된 거 아니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아니다.
나는 신랑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영어를 잘 했다.
내가 영어를 잘 했다는 의미는 원어민만큼, 혹은 조금 양보해서 박사만큼, 혹은 영어 전공자만큼 잘 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문법을 먼저 배운, 이론영어를 먼저 배운 한국인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는 영어의 flow 를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
우리 신랑은 영국인 중에서도 악센트 강하다는 스코틀랜드 남자이다. 지금은 악센트가 많이 약해졌지만, 처음 만날 때만 해도 악센트가 많이 강했었을 거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판단이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영국-한국 국제커플들이 모든 영국 남자들 중 우리 신랑 악센트가 제~~일 강하다고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신랑의 악센트가 얼마나 강한 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신랑과는 무려 10년을 함께 해왔으니, 내 귀에만 신랑 악센트가 약하게 들리는 걸 수도 있지만 시부모님 악센트에 비하면 정말 양반인 걸로!
신랑과의 첫 만남에서 내가 신랑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들어서 'Sorry?' 라던가 'Could you say that again please?' 와 같은 말을 사용하거나 'I don't know what you mean.' 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구어체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어렵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으나, slang 같은 것도 앞 뒤 문맥을 통해 유추하는 데 무리가 없었던 덕. 아마 영어를 문법으로 배우고 공부했다면, slang 이나 모르는 구문이 나왔을 때 유추하는 능력이 부족해 여러 번 되물어야 했었지 않았을까.
사실 첫 만남에서 뭐 'Sorry?' 가 나올 정도로 많은 대화를 했겠어?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오프라인으로 만남을 가지기 전에 이미 3개월 동안 온라인 상에서 매일같이 같이 밤을 새며 채팅하고 통화하며 많은 주제들에 대해 얘기해왔다는 사실. 오프에서는 비록 첫 만남이었지만, 한 10년은 알고 지내온 친구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별 얘기를 다 했다.
원어민의 입장에서 영어 못하는 한국인 친구를 고려하여 이건 한국인이 모르는 slang 이야~ 구문이야~ 라고 생각하고 말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기가 사용하는 말이 어떤 문법을 사용해서 만들어졌는 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는 편이 맞으려나. 평소 말하던 습관대로 말을 하니....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아쉬운(?) 내가 잘 알아들어야지 어쩌겠나.
위에서 나는 20년 동안 영어권 국가에는 발 들여놓은 적 없는 토종 한국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20년 동안 영어권 나라에는 한 번도 발을 들여본 역사가 없었던 내가 이런 영어의 flow 를 잃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학문 영어에는 명함도 못 내밀지만, 외국인이랑 대화하는 걸 두려워하거나 거부감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중,고등학교 때 문법이나 수능 영어에서는 그리 좋은 점수를 받지 못 했지만 영어 말하기, 듣기에 만큼은 '근자감' 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해도 참 아이러니하다. 어떻게 학문 영어에는 딸린다면서 영어 말하기, 듣기에 근자감이 있을 수가 있을까?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봤더니, 내가 영어의 flow 를 잃지 않을 수 있던 이유, 내가 영어를 네이티브처럼 받아들일 수 있던 이유와 일맥상통했다.
'영어 즐기기'
영어를 포함해서 나는 언어를 참 좋아했다. 내가 언어를 좋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즐기기! 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퇴화해서 신생아 수준의 실력이지만,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영어, 일본어, 중국어 세 가지 언어를 정말 잘 했었다. jpt, HSK 자격증까지 딸 수 있었을 정도로. 이 언어들을 배우기만 했다면 아마 어려운 성과였지 않을까.
내가 영어/언어 하면 생각나는 기억들은, 항상 즐거운 기억이다. 중학교 때 구문독해 배울 때 딱 한 가지만 빼고. 문법을 문법으로 배웠는데 선생님이 너무 스파르타라서 힘들었었다. 지나고 보면 이 때의 공부 덕에 더 성장할 수 있어서 지금은 감사하지만, 당시에 영어를 재미로만 받아들이던 내가 갑자기 문법만을 위한 문법을 배우는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 이외에는 줄곧 영어를 즐기면서 습득했던 것 같다. 영어 공부를 따로 하지는 않았지만, 영어를 항상 가까이에 하고 살았다. 적과의 동침인가?
중학생 때, 매일같이 저녁 늦게 학원이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보기 시작한 미드. 한참 학업에 지쳐있을 때 미드는 나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지금이야 영드를 더 좋아하지만, 그 때는 미드를 더 좋아했다. 그 당시 나의 넘버원 드라마는 '길모어걸스'. 그 때는 지금처럼 넷플릭스가 없었기에 모든 드라마를 유료료 다운받아서 봤다. 학교가기 전 컴퓨터를 켜서 다운받기를 누르고 집에 오면 에피소드 여러 편이 다운받아져 있었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와서 몇 편의 에피소드가 다운받아졌는 지 확인하는 즐거움이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겠지.
만약 미드를 영어 공부용으로, 학습하듯 모르는 단어 찾아가며 딕테이션 해 가며 봤다면, 2-3시간을 내리 시청하며 빠져들 수 있었을까 싶다. 그것도 밤잠을 포기해가면서까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미있으니까 자꾸 뒷 내용이 궁금해서 보게 되었다지. 다행히 초등학생 때까지 엄마가 나의 영어 귀를 뚫어주신 덕에, 나에게 미드 시청은 영어 공부가 아니었다. 단지 하나의 취미였을 뿐. 그리고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취미를 공유하게 되었다. 영어 덕분에.
미드가 재미있는 게 없거나 조금 지칠 때엔 또 영어 팝송에 꽂혀서 수백번씩 들으면서 가사를 따라 흥얼거리고, 나중에는 혼자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미드, 팝송 등을 통해 접한 영어는 나에게 공부의 대상이 아닌 언어였다.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였던 거다. 하루에 못 해도 4-5시간은 꾸준히 이 짓거리 (엄마의 눈에는 아마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미드, 영드만 보고 팝송만 들으니 짓거리로 보이지 않았을까... ㅎㅎ) 만 해왔으니, 준 모국어만큼의 노출이 있었고, 그 덕에 영어의 flow 를 잃지 않았던 것 같다.
영어 즐기기! 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영어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태어나자마자 바로 엄마가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듣는 아이들은 단 한 명도 없다. 날 때부터 천재라고 할 지라도 알아듣고 말하는 데까지의 시간이 단축되는 것이지, 인풋 한 번도 없이 (물론 뱃 속에서 들었던 것들을 인풋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ㅎㅎ) 이해가 된다는 건 어불성설.
아이들이 크면서 한국어를 여기저기에서 접하게 된다. 엄마 아빠로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러면서 인풋이 하나 둘씩 늘고, 문법으로 배우지 않았음에도 단어 하나부터 말하기 시작해서 점차 문장으로 말하기를 시작한다. 이해도가 높아지니, 인풋 역시 다양해지면서 점차 단어를 확장해나가고 사용하는 문장 난이도 역시 올라가게 되고.
그래서 영어 환경을 만들어주는 건 정말 중요하다. 단계별 확장도 필요하고.
어렸을 때 엄마가 하루 종일 8개국어로 주제에 맞는 테이프를 집에 틀어놓으시고, sesame street 를 틀어놓으시고, 영어 노래를 틀어놓으시는 등 엄청나게 영어 노출을 시켜주셨다. 나는 뭔지도 모르고 자연스럽게 영어를 계속 들어온 것.
엄마표영어 하는 시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흘려듣기'를 우리 엄마가 무려 20년 전에 나를 위해 해주신 거였다. 엄마가 나를 위해 이렇게 헌신의 노력을 해주신 덕에, 나는 자연스럽게 영어 환경에서 영어를 즐기는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만의 방법으로 영어를 즐기며 영어 flow 를 잃지 않고 있다.
엄마표영어는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인지 엄마표영어로 꾸준한 성과를 이루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간,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사람들 역시 많다.
많은 엄마표영어의 선구자 맘들에 비하면 나의 엄마표영어는 아직 초보 수준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했던 엄마표영어 이야기라면 말이 달라진다. 나는 엄마표영어의 마루타, 아니 수혜자였다. 그 결과 나는 영어를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외국인을 만나도 두려움 하나 없이 근자감만으로 대화한다.
나는 한국에 살고 있는 영국-한국 다문화가정의 한 구성원이다. 신랑이 영국인. 우리는 한국에서 만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아이들에게 엄마표영어를 하고 있다.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표영어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표면적으로 한국의 여느 가정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블로그에서 우연히 나를 알게 된 사람들도 "저 집은 아빠가 영국인이잖아~ 시작부터 우리 집이랑은 다르네~" 하며 공감하지 못 하시는 경우도 많이 있지 않을까 혼자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고이 접어두시길. 실상은... 우리 집도 다른 한국인 가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둘째가 아빠와 놀지 않겠다며, 영어 거부를 했으니까.
영어를, 언어를 배운다는 건 큰 퍼즐에서 놓친 피스 하나 둘을 채워넣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바심 갖지 않고 꾸준하게, 아이가 흥미를 가지고 영어와 함께 한다면 영어와 함께 하는 아이의 멋진 그림이 완성되지 않을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20년 동안 영어권 국가에 발 한 번 들여놓지 않은 토종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내 옆엔 영국인 신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