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mmaPD Nov 21. 2024

함께 가는 거야

 나가라고 할 때까지 있어는 볼게

 "선배님 요즘 브런치 하신다면서요?"

 "헛. 어떻게 알았어?"

 "11층에서 선배님 글 쓰는 거 본 사람이 있다고."

 "아. 주말에. 집보다 회사 북카페가 좋을 거 같아서."

 "선배님, 회사 오래 다녀주세요."

 "응?"

 "제또래 저연차는 여자 PD들이 많지만, 고연차는 남자 선배들이 훨씬 많잖아요. 그만두지 않고 즐겁게 다니는 제 미래가 되어 주세요."  


 심쿵. 나를 보며 자신의 10년 후, 15년 후를 그려볼 수 있어 좋다는 후배님. 나도 너를 보면 가끔 내 생각이나. 훨씬 거칠고 모난 신입이었지만.  


 최근 몇 년간 신기하게도 여자 후배들만 들어왔다. 성별을 가린 블라인드 자기소개서에서 수많은 남자들이 탈락한다. 서글서글한 청년들을 1차 면접에서 후하게 올려보아도, 최종 PT에서 여자들을 넘어서기는 어렵나 보다.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하는 홈쇼핑 '어린' 여자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어떻게 이런 보석들이 굴러들어 왔을까 싶다.



 보석들은 편집도 잘하고, 자막도 군더더기가 없다. 팀 카톡창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는지 모른다. 자질구레한 팀 취합 업무도 매주 깔끔하게 해내고, 내 옆 자리는 말도 참 예쁘게 한다. 작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회사를 잠깐 떠나 있었는데, 올해 4월 복직하면서 솔직히 계속 다닐 수 있을까 싶었다. 회사에 대한 애정을 다시 불태우게 만든 건 팔 할은 사람이다. 옆 자리 C양과 앞자리 K양은 배울 게 참 많은 루키들이다. 모르는 것도 물어보고, 아는 것도 확인하고, 자꾸자꾸 귀찮게 해 본다. 항상 웃어주는 멘토 같은 멘티들이 내 책상을 둘러싸고 예쁘게 피었다.


 어느 구름에 비 올지 모른다고 했다. 슬로 브런치 작가 프로젝트 선생님이 인스타에도 본인 브런치 홍보하라고 하셨는데, 일주일에 네다섯 개 생방송도 쳐내기 힘든데, SNS 계정을 여러 개 운영하는 건 정말 자신 없었다.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즐기는 위인도 못된다. 작가 가면을 쓴다고 해도 금방 티 날 티. EST. 지인들에게 글 읽어달라고 질척대지 말라고 했는데, 벌써 링크를 보낸 카톡창만 몇 개 더냐. 그날도 회사 북카페에 나왔으면 조용히 처박혀 퇴고나 할 것이지, 빅마우스에게 먹는 브런치 아니라고 설명은 왜 해가지고. 열심히 써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고 해두자. 긍정회로 돌려야 버틴다.




 젊은 나는 권력욕이 많은 사람이었다. 친구들보다 잘 되고 싶고, 동기들보다 빠르고 싶었다. 그러다 느린 남자를 만나 해맑은 아이 둘을 키워보면서 행복을 손에 잡으려면 욕망은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팀장이나 본부장 같은 욕망을 품는 순간, 일상의 행복이 무너질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임경선 작가의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무기력, 나태를 착함, 초연함으로 혼동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다른 축의 문제이기에
'행복해지기 위해 욕망을 포기하고 주어진 현실에 만족해야 한다'라는
흔히 듣는 겸손한 말은 맞지 않다.   
 임경선 '자유로울 것' p.17


 팀장이 되고 싶지 않았다. 혹시 팀장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을 비운 것은 아니었을까. 정치판에 끼어들어 손바닥을 비비고 싶지 않다고 말해 왔는데, 지금 보면 모든 팀장들이 다 손바닥의 정전기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더 오래 앉아있고, 더 자주 경청했다. 최대한 노력해서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윗분들과의 소통과 응답에 썼을 것이다. 매일의 노력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내가 하지 못했던, 엄두도 내지 못했던 업무와 업무의 흐름들을 채운 사람들이다.


     

 욕망을 품으면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맞서기로 했다. 작가가 되는 길은 나를 고통으로 밀어 넣는 길이다. 준비가 되지 않은 채 매주 연재를 해보기로 한 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혼자 어둠 속에서 긴 터널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신기하다. 괴롭고 힘들어야 하는데, 좌절하고 우울해야 하는데, 이상한 새순 같은 것들이 스멀스멀 차오른다. 24시간을 쪼개고 쪼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다섯 손가락 끝에, 지난 몇 년의 평온함 속에 숨어 살 때는 몰랐던, 작은 희열들이 움텼다.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을 만족스럽게 바꾸려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실은 무척 행복감을 주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임경선 '자유로울 것' p.19


 '나 회사 안 그만둬. 못 그만둬. 열심히 다닐 거야. 그리고 이거, 그냥 써보는 거야. 오늘도 내일도 그냥 써보는 거야.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써보고는 싶어.'



 무엇을 쓰는지, 얼마나 잘 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쓰는 모습만 봐도 좋다는 후배의 말은 훌륭한 작품을 보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이전 04화 PPL 때문에 망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