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배의 매진법
초가을마다 배춧값이 치솟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햅쌀이 나오는 시기에 맛있는 김치는 먹고 싶은데, 기후변화로 배추 풍작은 점점 어려워진다. 작년 김장, 재작년 묵은지... 다양한 김치를 보유하던 집들도 김장 문화의 축소로 냉장고에 켜켜이 묵혀두는 김치가 줄어들고, 찬 바람에 뜨끈한 국물을 찾게 되는 계절, 김치 일찬만 있으면 되는 바람은 더욱 간절해진다. 집집마다 통 안의 김치가 똑 떨어지는 시기. 김장은 안 해도, 김치를 쟁여놔야 마음이 편한 어머님들의 의무감은 서서히 근심으로 물든다. 안 그래도 배추가 부족한데, 김치 확보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 이 시즌 배추와 김치에 대한 목마름이 더 타는 것일 수도. 배춧값이 오르고, 김치값도 오르면, 김치방송의 몸값도 후끈 달아오른다.
"매진. 매진. 매진. 오늘도 매진입니다. 뜨거운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진짜 없어서 못 파는 신나는 김치방송. 브랜드를 막론하고 이 시기 김치방송은 정해진 시간을 다 못 채우고, 준비한 수량이 빠르게 동난다. 올 10월도 그랬다. 너도 나도 김치방송을 하게 된 PD들은 싱싱한 배춧잎처럼 입꼬리가 귀에 걸렸고, 김치 뒷타임 방송을 맡은 PD들은 벌레 먹은 고추처럼 입이 튀어나왔다. 내 입술은 대게 바짝 마른 페페론치노였는데, 어느 날 나에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선배님, 김치 또 물량 없어요?"
"아니야, 넉넉해. 너무 빨리 매진시키지는 않을게. 최대한 지루하게 안내해서 제 시간 다 소화하고, 아름답게 매듭짓도록 할게."
그렇다. 나는 안 되는 상품을 신들린 듯 팔아재껴 매진시킬 수는 없지만, 잘 되는 상품을 천천히 팔아 매진의 완성도를 높일 수는 있다. 신나지만, 흥분하지 않고, 핸즈 업하고 싶지만, 캄 다운. 내 시간 내에만 다 팔면 된다는 생각으로 여유 있게 시간을 쓰자. 그게 농익은 PD의 동료들을 위한 배려라면 배려고, 안정적인 상품운영을 위한 전략이라면 전략이다.
보통은 [체크포인트]라는 꼭 고지해야 할 식품표기 전면을 누구나 읽고 싶지 않게 만드는 데, 이럴 때 쓰는 기술 중에 하나는 그 내용을 오래 내보내는 것이다. 고객님의 올바른 소비를 위해 정직한 방송을 하겠다는 고결한 마음으로 모든 고객님이 정독하실 수 있게 충분히 길게. 습관이 무섭다고 체크포인트 전면을 PD콜 없이 빨리 넘기려는 CG감독의 검지를 꽉 잡고, 고개를 사방으로 흔든다.
"으으으음, 조금만 더!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게."
마음이 평온해지는 음악으로 BGM을 바꿔볼 수도 있다. 홈쇼핑에서 발라드를 들어 본 적 있는가? 피아노 연주곡은? 잔잔하게 잔나비로 갑시다. 격앙된 목소리, 고조되는 음악으로 잠시라도 고객을 채널에 묶어두어야 하는 인간이 물구나무를 선다.
'좋다. 이런 음악이 귀를 더 붙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음악이 쉬어가자는데도 콜판이 성을 낸다. 주문이 많이 몰려 상담원들이 모두 대기가 걸리면 콜 현황판이 빨간색으로 변한다. 목관리가 생명인 쇼호스트들에게도 잠시 쉼을 선물해야 할 때다. 고객을 자극하면 이 게임은 바로 끝날 테니까. 화면너머 어머님들께 진심을 전한다.
"조금 더 차분히 생각해 봐요, 진짜 이 김치가 필요한가요?"
앞방송이 예상치 못하게 빨리 매진되면 그야말로 전쟁이다. 방송과 방송사이 잠깐 휴식을 취하는 스텝들을 PD는 부조로 불러들여야 한다. 화장실 간 영상 감독은 뒤처리나 잘했을까 싶게 뛰어오고, 담배 태우는 카메라 감독도 연기보다 빠르게 제 자리로. 쇼호스트들은 립스틱도 바르지 못한 채 On Air 사인을 발견할 수도 있다.
약속된 시간보다 빨리 다음 방송으로 넘기는 기습 대포를 쏘고 싶지는 않다. 김치 방송에 불이 붙어 준비수량이 달달거리면, 뒷방송 PD는 꼭 방송 전에 해야 할 사전녹화도 포기해야 하고, 리허설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생방송을 시작해야 한다. 본 생방송이 70분짜리였는데, 주문 열기로 증발해 버린 김치 방송을 20분 이상 넘겨받는다면, 준비되지 않은 채 90분을 버텨야 한다. 참사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달려온 스텝들의 원성이 긴 전쟁에 지친 군졸들처럼 드높다.
김치 MD는 MD대로 항상 완판이 좋기만 한 건 아니다. 너무 빨리 매진되어 버리면, 목표달성에 대한 칭찬은커녕 왜 물량을 그것밖에 확보하지 못했냐고 타박을 받는다. 더 정밀하게 예측해서 모아 와야지, 적당한 비프라임 시간대로 넣었어야지, 다른 서브코드 나박김치라도 만들었어야지.
뒷 방송 MD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 재핑이 틀어진 시간대에 일찍 들어가야 하는 새우 등 터진 상황을 협력사에게 전하는 건, 퇴근시간에 소집되는 본부회의처럼 피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소통의 전문가인 MD들도 까다로운 협력사들을 상대하는 건 압박이 될 터. 더 긴 시간, 더 많이 팔아드리겠다는 눈빛연기를 하면서 홈쇼핑 녀셕들은 허리를 숙인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알맞게 예측된 수량을 가지고, 정말 필요한 고객들에게, 제 시간에 딱 맞추어 남김없이 팔아치우는 것, 그런 ‘여유로운 기적’이 아닐까?
당신이 우연히 홈쇼핑을 보다가 판매시간이 종료됨과 동시에 매진도장이 찍히는 장면을 마주한다면,
"아 오늘도 아름다운 항해였어" 화면너머 미소 짓는 누군가를 떠올려주기를.
오늘도 감사합니다. 고객님, 협력사님, MD님, 그리고 나의 스텝들, 나의 후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