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고 생각할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백할 때가 된 거 같아요. 저 사실 연재 깜냥이 안 돼요. 브런치북 일단 시작해 두면 매주 1편씩은 무조건 쓸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금요일 연재 날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답답해져요. 이러려고 브런치 프로젝트 도전했던 건 아닌데, 일과 육아, 작가의 의무까지 다 잘하려다 보니까 가랑이가 찢어질 거 같아요. 열정은 좀 내려놓고 우아하게 삶은 즐기는 사람이고 싶었거든요. 여유로워 보이는 그런 사람. 근데 현실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에 깊은 잠을 못 자고, 설거지, 빨래 다 미뤄두고, 아이들 밥도 배달음식으로 대충 때워주고 있어요. 주객이 전도된 일상. 망했어요.
지난 화요일, 시간을 쪼개서 새벽부터 달려 그럴듯한 4화 글을 썼어요. 하면 되네 생각하며 뿌듯했어요. 근데 브런치 로그인을 안 하고 썼던 거예요. 저장을 하려고 보니, 로그인부터 하래요. 그때 한글파일에라도 옮겨두었어야 했는데, 다 날렸죠, 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정말 몇 년간 드러내지 않았던 내 안의 동굴 속에 잠들어 있던 괴팍한 사자가 깨어났어요. 으어어어어흐흐흐흐흐흥크킄.
우아함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침착하고 싶었지만, 잘 안되었어요. 뭘 집어던지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에요. 차분히 돌아봤어요. 내가 정말 작가를 할 수 있을까? 원고가 다 날아가도, 처음부터 다시 쓰라는 호통을 들어도, 연재일의 압박이 목을 조여와도 '쓰고 싶은' 사람이 작가가 아닐까. 그만큼 나는 쓰고 싶을까? 항상 '이만하면 됐다.' 파워 긍정형 자기 합리화 인간이 '퇴고'라는 끝도 없는 작업을 해낸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생각해 보면 오랫동안 해왔던 회사일에서도 저에게 퇴고는 없었던 거 같아요. 홈쇼핑 PD는 매주 다른 상품을 맡게 되고, 매일 다른 방송을 진행해야 하죠. 한 가지에 몰입된 일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의 상품을 빠른 시간 안에 기획하고 준비해서 일정에 맞춰 방송을 쳐내야 하는 업무들이죠. 미팅도 핵심만, 편집도 빨리, 자막도 빨리, 시간 안에만. 그렇지만 모두 저처럼 일하는 건 아니에요. 똑같은 일도 더 나은 표현을 위해서, 더 나은 영상을 위해서,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편집에 공을 들이는 예술가적인 후배들이 있어요. 저는 주어진 대로 잘 팔아치우는 장사치일 뿐이고요.
오늘 하고자 했던 이야기도 그 태도에 관한 것이다. 보통 내가 많이 하는 방송은 식품이다. [건강기능식품]은 식약처에서 인정한 기능성들을 가진 제품이다. 약은 아니고 식품인데, 기능성을 가지고 있는 원료가 함유되어 병을 고쳐주진 않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제품. 근데 이런 제품들은 심의가 까다로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서자의 서러움을 많이 겪는다.
"이거 먹으면 치매 안 걸려요~!"
딱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상품과 연관 지어 병명을 얘기했다면 [방송심의위원회]라는 곳에 끌려간다. 끌려가면 사과방송도 해야 하고, 자주 걸리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회사 심의팀은 까다롭게 내 자막에 태클을 건다.
"이렇게 쓰고 싶으면 단서를 이만큼 다세요."
"이만큼 주저리주저리 달면 이 글자가 눈에 보이겠습니까?"
고객의 입장에서, 고객이 원하는 방송을 한다는 게 어디까지일까? 고객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해야 하지만, 고객에게 오인소지를 주어서는 안 되니까. 항상 고민하는 부분이다. 고객이 이미 이 어려운 소재를 알고 있어서, 보자마자 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내가 열렬히 고백하지 않아도, 나를 단번에 선택해 주는 첫사랑의 꿈처럼.
"PPL이 있는 방송입니다."
"와 정말이요?"
드디어 첫사랑 같은 달콤한 대박이 오겠구나. 고객에게 이 어려운 원료명을 얼마나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한두 푼도 아니고 몇 십만 원짜리 상품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편성되자마자 두통을 불러왔던 난해한 상품이 PPL이 있단다. 나의 게보린 같은 PPL.
PPL은 "Product Placement"의 약어로, 영화나 드라마 등의 미디어 콘텐츠에서 제품이나 브랜드를 노출시켜 홍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 AskUp
내가 정의하는 PPL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광고랄까. 다짜고짜 사세요! 외쳐대는 홈쇼핑에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전략이 있다. 타 채널에서 건강정보 프로그램을 보고 넘어오는 찰나에 그 상품 방송을 하는 것이다.
"레몬이 그렇게 좋답니다." 토크쇼를 본 후,
'아 나도 먹어보고 싶네' 하며 리모컨을 돌리는 순간,
[레몬즙]을 팔고 있는 홈쇼핑 녀석들.
"독일 맥주공장 사람들은 탈모가 없었대요." 아침 정보방송에 빠졌다가,
'어머 이런 게 있었어?' 하고 리모컨을 돌리는 순간,
[맥주효모] 탈모방지 샴푸까지 드린다는 녀석들.
마음 편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뭐 준비랄 게 있나요? 하하하. 종편에서 전략적 프로그램이 끝나는 타이밍에 잘 맞춰 쇼호스트 설명을 들어가면 백발백중 성공이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말하지 못하는 설움을 종편에서 "걔가 걔 아빠였대"하고 퍼트려주니, 사실 PPL이 잡힌 방송은 PD의 역량보다는 외부 마케팅에 의지해 쉽게 목표달성을 해왔다. 꿀이었다.
"어, 어, 이상하다. 왜 안 하지?"
"PD님, 종편사에서 PPL날짜를 착각했대요."
"네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못했다. 더 철저히 준비했어야 했는데, 머리가 하얘졌다.
연차가 쌓이면 뭐 하리. 옆자리 기술감독과 내 경력만 더해도 홈쇼핑 40년이 넘는 세월인데, 우리는 우리의 무능력함을 인정하며 가만히 앉아 괴로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용어 자체가 너무 어렵고, 심의받은 말만 할 수 있는데, 자막을 읽기만 해서는 설득이 안되고, 그나마 히스토리를 알고 있는 쇼호스트가 휴가 가서 PPL만 믿고, 대타를 투입한 방송이었다. 화면너머 아무도 없는 느낌. 우리는 넋 놓고 망연자실 앉아있을 수밖에.
그날 최악의 한자리 수 매출을 기록하고, 엠디와 협력사의 사과를 들었다. 한번 더 편성표를 확인했어야 했는데, 죄송하다고 했다. 매출이 좋지 않다고 해서 당장 사장실에 불려 가거나 내 월급이 깎이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내가 마주한 나의 안일함의 민낯에 도저히 괜찮다 할 수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제가 더 죄송합니다. 내가 더 노력했다면 나아졌을까? 매출에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 해도 내 마음은 편했겠지. 아무도 모를 테지만, 나는 아니까.
"엄마 표정이 왜 그래?"
"어, 엄마 오늘 5점 맞았어."
(허어어어어어얼!)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고마워. 엄마도 너 수학 5점 맞아도 화 안 낼게."
썼다. 써졌다.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주도 발행할 수 있겠어요. 가장 못하는 일, 싫어하는 일. 조금의 차이를 위해 다듬어가는 일. 그 끈기의 과정을 사랑해야지. 고통을 이겨내다 보면 더 단단해지겠죠? 아직도 많이 두렵지만, 단단한 우아함을 향해 더 준비된 사람으로 거듭나볼게요. 독자님, 감사합니다. 고객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