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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mmaPD Nov 01. 2024

내 옷도 모르는데요.

우리 고객님들은 싸야 남편 생각이 나나보다.


 “네? 제가 패션을요?”     

 우연히 엊그제 사 입었던 청바지 방송이 일요일 새벽 긴급으로 잡혔다. 본래 내 건강식품 방송 하나 건너 앞 타임. 그 바지만 입고 다녔더니 소문이 났나? 패션 피디가 아닌데, 패션을 하래? '회사 나오는 김에'라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인 내가 바보 같다. '그래, 팀장님이 나를 많이 믿으시는 거야.' 애써 자기 최면을 걸어본다. 협력사와 엠디는 불안할 텐데, 이 나이에도 아는 척, 탈을 써야 할 순간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손히 인사하며 미팅룸으로 들어섰다.      

 “쨔잔~ 찐 고객입니다. 제가 방송 준비하다가 너무 좋아 보여서 부조서 사 입었거든요. 이 청바지를 방송하게 될 줄이야! 이 무슨 운명인가요?”

 “어머 피디님, 잘 어울려요."

 “진짜 편해서 맨날 이것만 입어요. 쫌 도전적으로 사이즈를 작게 사봤는데, 딱 맞아서 더 기분이 좋았어요!”

 “약간 루즈핏하게 한 사이즈 크게 입으셔도 될 것 같아요."

 

 ‘아, 그렇게 입는 거였구나, 이런!’ 디자이너의 의도도 모르고, 마냥 27 사이즈가 허리에 잘 맞는다고 좋아하고 있었으니. 원래 통으로 고무줄 밴드가 숨어있어, 누구나 입으려면 다 입어지는 그런 바지였다. 숫자를 욕심내지 않았으면 길이감도 더 예뻤을까? 솔직히 묻고 싶었지만, 여기까지만 하자. 굳게 입을 다물고, 기술서 내용을 경청하기로 했다.     

 

 “1만 원 더 친다고요?”

그 이름도 화려한 최/초/최/저/가!

[최초]가 붙는다는 건, 첫사랑만큼 설레는 일이다.

[최저가]라는 건, 변우석 같은 연하가 따라다니는 기분쯤으로 해야 할까?

[최초 최저가]란, 밋밋한 내 자막에 눈에 확 띄게 빨간딱지를 붙일 수 있다는 것. 게임 끝!


 미팅을 종료하면서 큰 사이즈를 하나 더 입어보라고 챙겨주시기에, 남편 입혀 보겠다며 남자 사이즈를 한 장 샘플로 받았다. 남편은 나보다 늘씬해서 그의 키와 허리둘레를 말할 때, 아줌마는 조금 더 당당해졌다. 이로써 신혼여행 이후 15년 만에 커플 청바지 완성! 이번에 가족여행 갈 때 입어봐야지.


‘딸이랑 남편이랑 한 세트씩 사줬는데, 너무 만족해요!’ do**** (50대/여)

‘남편 작업복 겸 외출복으로 구매했어요!’ ok*** (40대/여)

‘남편이 입어보고 넘 맘에 든다고!’ lik** (30대/여)


 어떤 방송을 준비할 때든 [고객 상품평]을 우선 열어본다. 배달 음식을 주문하거나, 작은 학용품 하나를 로켓 시킬 때도 우리는 상품평을 먼저 읽지 않는가. 상품평 속에 답이 있다. 고객님들의 남편 사랑을 통 자막으로 크게 띄워, 쇼호스트들을 유도했다. 여성 사이즈의 비중이 더 높기는 했지만, 남성 사이즈 물량이 빠르게 소진되었다.


 홈쇼핑 패션 방송은 직전 판매 통계를 바탕으로 치수별로 예상 수량을 조절해서 방송 물량을 준비한다. 방송 내내 각 사이즈별로 남은 수량을 체크하느라 진땀을 뺐다. 굉장히 짧은 40분 새벽 방송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남성 사이즈는 전량 조기 매진되었다. 남성 데님을 이 시간에 다 팔다니. 혹시 남편 있는 여자라서 가능했을까?


 20년 가까이 홈쇼핑을 다녔지만, 남자 의류방송에서 비싼 아이템을 본 기억이 없다. 모피, 보석, 명품백…. 홈쇼핑 고가의 방송은 늘 여성 아이템으로 채워진다. 남자 시계를 팔았던가? 남성 벨트를 팔았던가? 안 그래도 싼 상품의 가격이 더 내려갔을 때, 그제야 우리는 바깥양반을 떠올린다. 남편이 된 이상, 이걸 입으나 저걸 입으나 같거든요. 싸고 질긴 거 막 세탁해도 되는 거 그런 거면 되거든요. 내 품이 덜 가고 가계 경제에 무리가 안 가는 선에서, 새 옷이라 할 수 있는 배송 박스와 비닐 뜯는 재미만 제공해 주면 생색낼 수 있지요, 암암.


 “엠디님 우리 아버님들 새 옷 얻어 입으려면 가격 쳐야 해요!”


 뭘 팔아도 잘 파는 PD가 되고 싶다. 여행도 가기 전에 신나서 입고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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