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을 알고 싶던 자, 고객이 되다.
불타는 금요일 막방이라니. 그래, 이런 건 아줌마가 맡는 게 맞지. 싱글들아, 부디 열심히 놀고, 열심히 마시고, 뜨겁게 사랑해라!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너무 추리하지 않은 츄리닝 바지를 입는다. 어둑해진 밤 9시쯤 두 번째 출근을 한 후, 간식부터 챙겨 먹는다. 그래도 막방 근무자들을 위해 빵과 음료를 제공하는 아주 훌륭한 회사다. 굳이 배고프지 않았음에도 든든히 뜯어먹는다. 새벽 한 시가 되면 꼭 꼬르륵꼬르륵하기 때문에, 위장이 아닌 방송에 집중하기 위해선 매주 똑같은 빵일지라도 넣어두는 게 좋다.
홈쇼핑은 보통 새벽 6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생방송으로 운영된다. AM6:00~7:00까지 진행하는 첫 라이브를 ‘첫방’이라고 부르고, 다음날 AM1:00~2:00까지 진행하는 생방송을 ‘막방’이라고 부른다. 연차가 꽤 쌓였지만, 아직도 나는 첫방, 막방을 하는 평 PD이다. 상품을 기획하는 MD팀에서 상품 목록을 짜고, 편성팀에서 적절한 시간대에 상품을 배정한다. 그 후, PD팀장이 각 시간대와 주력 운영상품에 맞게 PD팀원들을 배치하는데, 이 말인즉슨, 보름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규칙한 편성표의 노예라는 것이다.
방송 심의가 완료된 자막을 뽑고, 고객님들이 보게 될 화면 속의 CG와 오류가 없는지 체크한다. 무대와 쇼호스트 의상을 체크하고, 간단히 어떤 방향으로 진행할지 의견을 나눈다. 필요하면 생방송 전에 간단한 사전 녹화 영상을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오늘 2박스나 더 주는 사은품을 강조하고자 할 때, 본 구성을 찍은 후, 2박스를 더해서 한 번 더 찍는다. 이렇게 촬영해 두면, 쇼호스트가 오늘 방송에서만 무지막지 많이 준다는 멘트를 할 때마다 고객님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다. 사은품 2박스를 보여줬다가, 사라지게 했다가, 들어다! 놨다! 들었다! 놨다! 깜박깜박 강조하며 안달 나게.
생방송 30분 전, 부조에 스탠바이 상태로 앉아서 내 앞 방송을 지켜보았다. 청바지 3벌을 4만 원대에 팔고 있었다. 쇼호스트가 다리를 쫙쫙 벌려가며 츄리닝처럼 엄~청 편한 데님이라고 하는데, 옆 자리 CG감독이 어깨를 톡 쳤다. “아, 피디님, 배송일 언제냐고요?”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 가있던 정신을 주섬주섬 줍는다. 물류팀에서 확정해 준 배송일 확인과 함께, 바지 주문이 정상적으로 완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어릴 땐 진짜 안 낚였는데, 요새는 참 잘도 산다. 부조에서 방송 준비하면서 사고, 후배가 먹어보라고 주면 또 맛있어서 사고, 심지어는 미팅하면서 반해서 내 방송에서 결제할 때도 많다. 실적도 올리고, 필요욕구도 채우고, 일석이조라면서 말이다. 감도 사고, 사과도 사고, 휴지도 사고, 남편 속옷도 사고... 이제 나는 홈쇼핑의 VIP 반열에 오른 것일까?
스물여섯부터 방송일을 시작하였다. 홈쇼핑은 방송을 하기 전, 관계자들이 모여 사전제작회의를 한다. 업계 사람들은 간단히 그것을 미팅이라고 부른다. 상품을 만드는 협력사, 상품을 기획한 MD, 방송을 진행할 PD, 쇼호스트들이 모여, 어떻게 이 상품을 팔 것인가에 대한 전략을 세운다. 2006~7년, 그 당시 홈쇼핑의 주 고객층은 30~40대였는데,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나로서는 왜 이런 상품을, 이렇게나 많이, 고객들이 사대는 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이들이 방학했죠? 아휴~ 엄마들은 개학이네요.”
이런 멘트를 하는 쇼호스트를 못마땅해하며, ‘아놔, 빨리 상품 설명이나 하지, 왜 쓸데없는 소리를?’ 생각했었다. 화장품을 파는데, 가을 낙엽의 쓸쓸함을 논하고, 다이어트 식품을 팔면서 어젯밤 뭘 먹었는지 수다를 떤다. '안물안궁이라고요? 언니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본격적 내 살림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희미하게 그런 말들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뭐가 뭔 지도 모르는 채로 PD라는 탈을 쓰고 다 아는 척 눈알을 굴리던 시절을 지나, 고객의 마음을 향해 질문하기 시작한 어느 날이었다.
“30대들은 왜 이게 필요할까요?”
협력사의 전략을 듣고자 가볍게 던진 인사 같은 한 마디에서, 순간 깨달았다. ‘아, 이제 내가 30 대지! 내가 필요한 이유가 고객들이 필요한 이유가 되겠구나!’ 나는 이게 왜 좋지? 언제 쓰고 싶지? 내가 생각하는 바를 의심하지 않고, 고객의 생각이라고 판단해도 되지 않을까?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는 순간이었다. 내 나이가 내 직업에 알맞게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2011년, 새로 생긴 홈쇼핑회사로 이직하면서 메일 아이디를 새로 만들었다. 그때 만든 아이디가 줌마피디 jummapd다. 고객의 눈으로, 고객의 입장에서, 고객의 마음으로 파는 피디 = (아)줌마피디. 아직 아이도 없을 때였지만, 그때 난 참~ 아줌마로 불리고 싶었나 보다. 그 당시 쓴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아줌마로 불리는 게 좋았다. 아줌마가 되어 기뻤다. 나도 드디어 고객과 하나가 되었구나!’
오늘 나는 청바지를 샀다. 고객처럼 잘 사는 피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