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럽다 쇼호스트, 나도 잘 먹을 수 있는데
"감태요? 우와, 이거 미슐랭에서 쓴다는?"
"네 맞습니다. 조선호텔, 갤러리아 백화점 입점했고요. 파리, 뉴욕 3 스타 레스토랑에도 수출하고 있습니다."
"우니랑 성게알이랑 막 캐비어, 참치 뱃살 그런 거 준비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요. 고급스럽게 디피하겠습니다."
부럽다. 쇼호스트. 벌써부터 침이 고인다. 50분 방송동안 쇼호스트 설명을 세 번은 진행하니까 진짜 실컷 먹을 수 있겠다. 아, 맛있는 건 카메라가 돌지 않아도 먹는구나. 방송 끝날 때까지 조금만 남겨줘요. 보통 끝나자마자 부조정실에서 스튜디오까지 10초 만에 뛰어내려 가도 맛있는 접시는 게임오버다. 다른 방송준비하다가 와서 맛보기도 하고, 이미 스튜디오 안에 굶주린 어린 양들이 많으니.
"진짜 잘 먹습니다. 배가 부른 사람도 제가 먹는 걸 보면 먹고 싶어 진다고 합니다."
NS홈쇼핑(입사할 당시 농수산 홈쇼핑)은 나의 첫 홈쇼핑사다. 방송 아카데미나 쇼호스트 학원 한번 안 다녀보고, 호기심에 이력서를 제출했는데, 단 번에 턱 붙었다. 식품방송 비중이 높은 이 회사야말로 나를 뽑아 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첫 이력서에 덜커덕 붙을 줄은 몰랐다.
난다 긴다 예쁜 후보들이 많았는데, 내가 뽑힌 게 정말 신기하긴 했다. 특히 그 해는 패션방송 비중을 높인다며, 모델 같은 쇼호스트들을 뽑았다. 실제로 현재 CJ 패션 간판스타 활동하고 있는 K쇼호스트도 내 동기다. 평균 170이 넘는 늘씬 미녀들과 함께 합격한 게 나조차도 의아하긴 했는데, 나중에 면접장 촬영 감독을 통해 듣게 되었다. 심사하다 빵 터진 임원들이 일단 쟤는 붙여보자 했다고.
"쇼호스트를 지원 안 했으면 뭐가 됐을 거 같아요?"
"대통령이요."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9개월의 영국 연수와 3개월의 유럽 유랑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남들이 좋다는 곳에 마구 이력서를 뿌려볼 생각은 없었다. 젊은 날 타국에서 외로이 걸으며 나 자신과의 대화를 많이 하게 됐는데, 한 번뿐인 인생 가능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는 마음이 일었다. 정치 공부를 조금 더 해보고 싶었지만, 돈 벌어오라는 엄마의 단호한 말에 최선은 '쇼호스트'였다. 내가 하고 싶은 '방송'과 내가 잘할 수 있는 '장사'의 교집합. 치열한 고민 끝에 직업을 택했고, 도전했고, 된 듯했으나, 최종 PT에서 고배를 마셨다. 11명 중 5명만 채용한다고 갑자기 공지가 떴다.
허망하게 짐 싸서 집으로 왔다. 입사인 줄 알았는데, 인턴이었다. 3개월 교육받는 동안 신의 직장에 뽑힌 듯 가스라이팅을 당해서 완전 NS인이 되었었는데, 최종 불합격이라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혼자 이불 뒤집어쓰고 숨죽여 주룩주룩 볼때기 빗물을 훔쳐내고 있는데, 띠리리링. 전화 벨소리.
"NS홈쇼핑 인사팀입니다. 내일 사장님이 면담하자고 하십니다."
뭐지? 왜? 다음 날 사장실, PD를 하란다. 정말요? 사실 각 팀에서 일주일씩 직무교육받을 때, 직군마다 모두 다 매력 있어서 MD도 해보고 싶고, PD도 해보고 싶었다. 그 회사는 직무전환이 자유롭고, PS제도라고 PD혼자 MD업무까지 도맡아 하는 경우도 있어서 더 욕심이 났다. 어제 무너져 내린 하늘에, 오늘 구멍이 솟아나네. 사장님이 행여 말씀을 다시 주워 담을까 무서워, 재빨리 90도 인사를 하고 나왔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때론 인생은 예기치 않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다시 PD가 되어 출근한 나는 '사장조카'라는 헛소문(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긴) 주인공이 되었다. 백 하나 없지만, 백 있는 소문을 메고 즐거운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이 일을 19년째 하고 있다.
요리의 태가 나는 감태.
고급 식재료가 착 감기는 맛.
트렌디한 식재료를 선보이는 재미.
좋은 가격에 좋은 제품을 소개하는 기쁨.
쇼호스트만큼 말은 못 해도 쇼호스트의 말머리를 잘 틀어주는 PD. 쇼호스트 입을 통해 내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터져 나올 수 있도록 많은 고민과 경험을 나눈다.
처음 '감태'를 접한 곳은 청담동에 위치한 '정식당'이라는 파인다이닝이다. 맛집이라고는 짬뽕집 밖에 모르는 남편이 딱 한 번 결혼 10주년인가 데려가줬다. 큰 접시에 영롱한 빛을 내는 예술 한 조각. 감태 애피타이저는 보기에도 예뻤지만, 제 각각 팡팡 터지는 식재료들의 군무가 참 아름다웠다.
가만, 이 남자 내 동기 PD가 소개해줬는데, 내가 PD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 남편 못 만났겠지?
한 예능에서 배우 한가인이 감태 파스타를 선보인 후 감태에 대한 수요가 더 뜨거워졌다. 협력사는 ‘감태 페스토'도 따로 개발해 M컬리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감태만을 고집스럽게 연구한 감태 명인과 그 뒤를 있는 백년 가게 ‘바다숲' 2세들. 우리나라에서 가업을 이어 정진한다는 것이 드문 일이기에, '바다숲 감태' 협력사가 더 오래오래 좋은 식재료를 선물하는 곳으로 남았으면 한다.
가만, 방송이나 잘하지 글은 왜 쓰고 있지? 또, 예기치 않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만나게 될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