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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꺼운 손가락 Oct 14. 2020

레온 슈피러

플라잉 휠체어 30화

아마도 81년 10월쯤 되었을 것 같다.





30. 레온 슈피러


 

김태경 선생님이 바로크 합주단의 포스터를 들고 들어오셨다.

“이거 봐 봐. 11월 11일에 바로크 합주단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한데.”

김 선생님이 약간 흥분된 상태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협연이 누군 줄 알아? 레온 슈피러*.”

“그게 누군데요?”

레온 슈피러가 누군지 내가 어찌 알겠나. 우리들 모두 뚱한 얼굴로 선생님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레온 슈피러. 이 사람 1960대 때부터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으로 있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라고. 카라얀의 악장이란 말이지. 아니 이 사람이 어떻게 한국엘 오는 거지? 올해는 정말 대단한 해다. 푸르니에에 이어서 슈피러까지.”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바로크 합주단으로 연락해봐야겠어. 어디로 연락하면 되려나?”

“음악회 보게 해 달라고요?”

“음악회는 당연한 거고. 음악회만 보기는 아깝잖아. 푸르니에한테도 레슨을 받은 우리인데. 그뿐이냐? 라살 콰르텟 제자가 될 사람들인데. 슈피러가 혹시 레슨을 해주실 수 있는지도 알아봐야겠어.”


풉.하고 웃음이 삐져나왔다. 어림 턱도 없는 소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선생님이 저렇게 말한 것 치고 이제까지 안 이루어진 일은 없었다.

왠지 레슨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받게 되겠지.


그럴 줄 알았다.

음악회가 다가오자 바로크 합주단을 통해 레온 슈피러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음악회 전날에 독일 대사관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은혜와 기적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두려워졌다.


그냥 이렇게 받기만 하면 되는 건가?

기쁘면서 두렵고, 좋으면서 겁이 났다. 슈피러에게 레슨 한 번 받고 싶어서 날고 기는 음악도들이 줄을 서있다는 데, 어떻게 우리는 단번에 오케이가 된 건지.


단 한 번의 레슨이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푸르니에도 슈피러도 내 인생에서 다시는 못 볼 사람들인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리의 비밀을 다 캐 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뚝불뚝 올라왔다.


이번엔 독일 대사관이었다.

독일 대사관 안에 들어가자 프랑스 대사관에서 느꼈었던 어색하고도 신기한 느낌, 어쩐지 독일에 온 것만 같은 낯설고 희한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건물 안을 구경했다.

시간이 되어 슈피러도 대사관으로 들어왔다. 푸르니에도 만난 우리인데, 슈피러가 대수냐며 기죽지 말자고 수천 번은 더 다짐했건만,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쿵쾅거리고 얼굴이 점점 굳어져가는 게, 안 그러고 싶은데 더 그러니까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김태경 선생님은 얼마나 방긋방긋 웃으며 슈피러에게 말을 하던지 그것도 놀라웠다. 어쩜 저렇게 서양 사람에게 자연스레 말을 걸 수 있는 건지. 두 사람의 대화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략 눈치로 어림잡아 얘기는 뻔했다. 어떻게 이런 콰르텟이 만들어졌는지를 물었을 거고, 어떻게 공부했고 어떤 연주를 했는지도 물었겠지.


내가 들었던 단어 몇 가지는 푸르니에, 신시내티, 라살 콰르텟, next year 뭐 이런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얘기는 이거밖에 없다. 우리는 얼마 전에 푸르니에게도 레슨을 받았었고, 내년에는 신시내티로 공부하러 가는데, 라살 콰르텟이 우리를 받아주기로 되어있다. 뭐 이런 얘기밖에는 할 얘기가 없지 않을까?


하이든 콰르텟 한 곡과 드보르작 아메리카를 연주했다. 레슨은 예상보다 길어져서 두 시간 가까이 흘렀다. 우리들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레슨이 끝나고도 슈피러는 우리를 가운데 놓고 김태경 선생님, 신동옥 선생님과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무슨 얘기인지 너무 궁금한데, 어떻게 대화를 끊어야 할지 끼어들어도 되는지, 혹시나 슈피러가 내게 뭘 물을지도 모르니까 그건 어려울 거 같고 해서 입을 꾸욱 다물고 또다시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신동옥 선생님이 유독 많이 웃으며 손뼉을 치셨다. 이것도 좋은 징조겠지. 좋은 일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신나 하실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슈피러는 라살 콰르텟의 세컨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신동옥 선생님의 스승이신 헨리 메이어와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고 하는 말을 이런 때 써도 되는 게 맞을까?

슈피러의 첫 질문은 에머슨 콰르텟도 겨우 통과했다는 그 과정에 어떻게 베데스다가 가게 되었는지였다. 내가 뭐 미국 학교의 코스웍을 알 리가 있나.

그런데 베를린 필 악장이 ‘어떻게 거기에’라는 말을 하는 걸 보니 신시내티에 가게 된 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기적 같은 일인가 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너희가 그 코스에 발탁되었다니 너무나 기쁜 일이고, 너희는 굉장한 행운아다. 이렇게 만난 게 인연인데 내가 추천서를 줄 테니 내일 아침에 호텔로 찾으러 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내가 미국 대학교를 가게 된 것도 기적인데, 베를린 필하모닉 악장의 추천서를 받게 되다니.

“Thank you. Thank you very much.”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공부를 더 피 터지게 해 두는 건데. 왜 이 말밖에 하지 못하는 건지.


우리를 칭찬해주려고 과장해서 말한 건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너희들이 복이 많은 것 같다. 내가 얼마 전까지도 아시아 투어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는데 여러 가지가 잘 정리되더니. 서울에도 오게 되었다. 아마 너희들을 만나 추천서를 써주기 위해 오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바이올리니스트 펄먼* 얘기를 해주셨다. 그 사람도 너희들처럼 휠체어를 타지만, 이제 사람들은 아무도 펄먼이 휠체어를 탄다는 것을 개의하지 않는다. 그는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만 기억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휠체어에 앉아서 연주한다는 것을 아예 잊어버린다. 너희에게도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추천서와 상관없이 입학허가를 이미 받았지만, 미국 학교는 입학서류 중에서 유명인의 추천서가 있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다. 신시내티 음악대학을 들어가는 데 베를린 필하모닉 악장이 써 준 추천서를 받은 아시아 학생들은 우리가 처음일 것이다.


하나님. 이렇게까지 해주실 거면, 차라리 나를 걷게 만드시는 게 더 쉬운 거 아닙니까.


※ 슈피러 Leon Spierer(1928~ ) 1958년~1963년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악장, 1963년~1993년 베를린 필하모닉 악장.


※ 펄먼 Itzhak Perlman(1945~) 정경화, 주커만과 함께 20세기 후반의 가장 위대한 3대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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