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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꺼운 손가락 Oct 14. 2020

유학준비

플라잉 휠체어 31화

바이올린만 하면 됐지 이런 거까지 알아야 돼?




31. 유학준비


 

하며 묻어두었던 것들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내가 얼마나 게으르고 철저하게 제멋대로인 사람인지 하루하루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들이 생기니까 전에 없던 초조함과 조바심까지 생겼다. 검정고시 준비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스토리가 펼쳐졌다. 책을 읽을 때는 재미도 있고, 몰랐던 사실, 지식들을 알아가는 게 좋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문제집을 풀기만 하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어느 날엔 ‘이 문제집이 사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하고 집어던졌다.

문제집이 무슨 죄라고 저 멀리 두 동강으로 찢어진 문제집을 째려보았다.

한참을 씩씩 거리니 문득 ‘저 문제집을 잘 풀어야 미국엘 갈 수 있다는데 사는 거랑 왜 관계가 없겠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 수 있나. 문제집까지 휠체어를 밀고 가서 바닥으로 몸을 숙여 문제집을 다시 집어 들었다.


날짜가 흘러가고 감당하기 힘든 일상은 굴러가고 있었다.

미국은 빨리 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검정고시를 먼저 봐야 하고, 시험은 정말 질색인데 안 볼 수는 없고 책을 펼치면 공부하기 전에 필승을 다짐했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눈꺼풀을 붙잡아 놓을 길이 없었다.


앞으로 펼쳐질 경험하게 될 내 인생이 궁금했다가, 생각보다 힘든 데 가지 말까도 싶었다가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왔다 갔다 했다.


졸린 눈을 붙들어 가며 이를 악물고 공부한 덕인지,

이듬해 4월에 치르게 된 고입검정고시와 8월 대입검정고시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통과했다.

신시내티에서도 입학허가서가 와서 복잡한 서류들을 하나씩 준비하면서 미국에 갈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서울 올라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난 2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기록해보기도 벅차게 흘렀다.


1982년 9월 2일


우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유학 가기 전 마지막 정기 연주회를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했던 첫 연주를 생각하면, 오늘 같은 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관객들은 우리가 누군지나 알고 온 사람들일까?

우리 음악을 어떻게 들어줄까?

우리 연주가 서울 사람들 귀에도 좋게 들릴까?

온갖 상상과 걱정이 뒤범벅이었는데,


오늘은 확실히 마음이 아주 편안하다.

우리가 누군지도 몰랐던 사람들의 지지와 관심은 무대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고, 간혹 연습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집중력과 음악적 완성도를 끄집어낼 때도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무대 뒤의 삐걱이는 나무 바닥마저 참 정겹게 느껴지는 날이다.

무대 문이 열렸다.

휠체어 바퀴는 아직 무대로 향하지도 않았는데, 박수소리는 이미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제가,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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