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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꺼운 손가락 Oct 16. 2020

라살 콰르텟과의 수업

플라잉 휠체어 33화

라살은 그들의 전용 연습실에서





33. 라살 콰르텟과의 수업


 

매일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콰르텟을 연습했다.

외부 연주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 신시내티에 있을 때에는 그 전날에 무엇을 했던 지간에 아침에 폭풍우가 오던지 폭설이 내리던지 상관없이 9시에 연습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12시에 점심을 드시고 커피도 마시고 천천히 오후 2시쯤에 레슨을 시작하시겠거니 했는데.

이게 웬걸! 아침을 레슨으로 시작했다.

언제나 당신들 연습 전, 8시, 어쩔 땐 7시에 부르신 적도 있었다.


도대체 몇 시에들 일어나시는 건지, 레슨 시간이 7시거나 8시거나 상관없이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주름 하나 없이 다려진 면바지를 입고 진하디 진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과 함께 1분도 틀리지 않게 연습실에 앉아 계셨다.

그리고 그 다음 레슨은 12시나 1시였다. 8시에 레슨을 받고 지적받은 것을 해결해서 바로 다시 레슨을 받도록 하셨다.


신시내티에 도착하고, 아파트 세를 얻고, 입학 수속을 하고 하루가 한 시간처럼 훌떡훌떡 지나갔다.

첫 레슨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첫 레슨은 라살의 리더 월터 레빈 선생이었는데 전달받은 과제는 하이든의 작품 중에 할 수 있는 것을 해오라는 것이었다.


하이든의 콰르텟은 콰르텟 음악의 기본이자 최고봉이니 첫 과제가 하이든인 건 너무 당연했다. 하이든의 작품 중에 한국에서 연주를 해 본 곡은 5도, 황제, 종달새 같이 대중에게 굉장히 많이 알려진 곡들과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난곡으로 여겨지는 곡들이 몇 개가 있었는데 종달새와 황제 중에 고민하다가 황제를 준비해가기로 했다.


첫 레슨이니만큼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황제는 하이든 콰르텟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했었던 곡이어서 아주 낮은 평가를 받지는 않을 수 있겠다는 계산도 들어 있었다.


떨지 말자. 연습한대로 표현을 잘 해보자. 정신 차리고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 들어보자.

잠을 설치면서 다짐에 다짐을 했다.


레슨실로 향하면서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는 이랬다.

우선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연주를 하고 나면, 총평을 해주시겠지.

그리고 중요한 몇 부분들을 다시 시켜보시겠지. 손가락번호나 보잉이 이상한 곳을 고쳐주시겠지. 뭐 이런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레슨 시작 10초 만에 와장창 깨졌다.

레빈에게 받은 첫 레슨은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차인홍의 사인에 따라 함께 첫 음을 그으며 황제 1악장을 시작했다.

두 마디를 채 못 갔는데 레빈 선생님이 연주를 중단시켰다.


“잠깐만. 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참 좋구나. 그런데 방금 그 부분에서 활의 위치를 왜 거기서 했는지 말해 볼래?”


얼굴이 벌게지고 당황했다.

왜 거기서 썼냐고 물으신다면, 사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냥 활을 대고 그었고 거기에서 소리가 잘 나는 것 같아서 썼는데, 막상 왜 거기서 썼냐고 물으니 내가 쓰고 있는 위치가 잘 못 된 건가 싶기도 하고, 영어를 잘 못하니 생각이랄 것도 없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퍼스트 바이올린이 이런 멜로디를 하고 있을 때, 멜로디의 느낌을 충분히 받쳐 주려면 세컨 바이올린이 어떤 스트로크를 사용하느냐가 아주 중요해. 그렇게 되면 들리는 음악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지. 그러니까 남들이 모르게 음악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돼.”


“잠깐만. 쉼표처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쉼표를 처리하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쉼표는 그냥 쉬면 되는 거 아닌가? 정확한 박자만큼만 쉬고 들어가면 되는데.


“쉼표직전 마지막 음의 마지막 순간 음처리가 쉼표공간의 색깔을 결정한단다.”

“콰르텟은 소리 4개가 분리되면 안 되고, 하나로 모아져서 한 곳을 향해서 소리를 보내준다고 생각하면 훨씬 쉬워질 거야.”

“잠깐만. 함께 호흡하며 들어오면 좋겠구나. 좀 더 세심하게 리더와 함께 숨을 쉬고 들어오자.”


겨우 한 음을 그었는데, “잠깐만”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순간 들숨에서 숨이 멈춰버렸다.

눈을 말똥말똥 굴리다가 다시 시작했다.

역시나 첫 음의 반 활도 쓰지 못했는데 선생님은 손을 들어 우리를 멈추게 했다.


“활을 내려 그을 때는 숨을 내쉬면서 부드럽게 줄에 붙여야지. 내지르면 안 돼. 다시 해볼까.”

“4명의 활 긋는 속도가 같으면 좋겠는걸. 그런 건 미리 약속을 하도록 하자.”

“잠깐만. 이 부분은 한 마디 전과는 성격이 달라. 서로의 활 위치와 속도가 다 달라야 해. 모두에게 f가 적혀있지만 다 다르지. 앞뒤의 상황을 봐야해.”

“비브라토의 속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하기만 하면 소리에 재미가 없어. 강약조절, 톤업, 소리의 색깔도 조정할 수 있어. 다시 해볼까.”


겨우 두 번째 음으로 진행했다.

“잠깐만. 내리는 활에서 올리는 활로의 바뀌는 순간에 말이야….”


음악의 연결, 음의 연결, 음악의 방향성, 소리의 속도, 색깔, 이것을 아우르는 음악성,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 등.


한 시간이 지났고 나는 땀에 흠뻑 젖었다. 8시55분가량 되었다.

레빈 선생님이 시계를 흘끗 보더니.


“시간이 다 되었구나. 이제 우리 연습시간이니까.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만날까? 그때까지 지금 말했던 거 해결해오면 될 거 같은데.”


무슨 정신으로 악기를 챙겨서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한 시간 동안 두 마디도 제대로 진행을 못했다.

충격 그 자체였다.


두 마디. 한 시간이면 하이든 콰르텟 두 곡을 연주할 수 있는 시간인데 우린 두 마디를 겨우 그어 봤고, 10초도 걸리지 않는 그 두 마디를 마스터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내일까지 이 부분을 해결해아야 한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이따 오후에 다른 선생님과의 개인 레슨이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밥맛이 뚝 떨어졌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그래도 꽤 많은 연주를 해왔는데 이 한 시간으로 이제껏 내가 만들어왔던 음악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나는 이런 걸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앞으로 고쳐질 수는 있을까. 그동안 나는 음악으로 즐거웠다. 싫을 때도 있었지만, 음악이 좋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즐거움은 관객의 몫이었다.

물론 내가 즐거워야 전달이 되겠지만 연주하는 내가 즐거워지기 위해 거쳐야하는 혹독한 과정들이 있었다.

반복, 고민, 고통과 인내, 이 모든 것을 감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에서의 연습시간들이 그리 처절하지 못했던 걸까.

나로서는 최선이었는데 잘 모르겠다.

이제부터 다시 배우면 레빈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그런 소리들을 만들어 낼 수는 있을까.


네 분의 선생님이 모두 성격이 다르고, 레슨 시간의 분위기도 다 달랐지만,

말씀하시는 최종적인 내용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월터 레빈은 자기 콰르텟의 리더답게 목소리에 무게감이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지닌 목소리로 “다시 해볼까?”라고 하면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 활을 다시 들었다.


메이어는 정말 인품 좋은 스승이었다.

늘 부드러운 얼굴로 우리의 연주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말고, 이렇게. 다시 해볼까?” 이런 말도 미소를 띄며 한다. 그럼 별 수 있나 활을 다시 들어야지.


비올라 캄니처는 언제나 유머 감각이 뛰어났다.

우리가 하는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들어 말할 때는 어떻게 생각을 해냈는지

“방금 그 부분은 말이야. 뭔가 고백할 게 있는 얼굴이어야 하는데, 좀 거만한 표정인거 같아. 그렇게 말고 비브라토를 조절해서 이렇게. 다시 해볼까?”

“아직 클라이맥스는 저 멀리에 있는데, 벌써부터 갖고 있는 열정을 다 쏟으면, 매력이 없지. 강약조절이 필요해.”


개인 레슨을 받을 때는 강도가 조금씩 더 세졌다.

횟수를 세어보니 콰르텟 레슨과 개인레슨을 합쳐서 일주일에 적게는 7회, 많게는 10회의 레슨을 받았다.


첫 달에는 정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미국에서의 생활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건 뭐 도망갈 틈도 없고, 도망갈 겨를조차 없었다.


일본에서는 공장일이 끝나면 일본 친구들과 놀기 바빴는데,

여기는 학교라 그런지 다들 경쟁적으로 연습을 하는 분위기였다.

미국이란 곳은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사람들이 놀기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다 거짓이었나 보다.


하지만,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으니 버틸 때까지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이를 악물고 첫째 주, 그 다음주, 또 한 달 그렇게 보냈다.

레슨은 언제나 좋고도 힘들었다. 나 혼자 악보를 뚫을 듯 들이판다고 해서는 절대 알 수 없었던 비밀의 문이 열렸다.

언제쯤이면 선생님의 도움 없이 이 문들을 쉽게 열 수 있을까.

머리로 이해되고, 귀로도 방금 들었던 그 소리가 왜 내 손을 통해서는 만들어지지 않는 것인지 활을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고, 왼손을 이렇게 잡았다가 살짝 손목을 틀었다가, 아니면 이 장소에서 숨을 쉬어볼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한 숨에 음악을 이어 가볼까.


하이든이나 베토벤은 드보르작, 버르토크, 쇼스타코비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악보가 간단한데, 소리만 내면 악보 뒤에 숨어있던 음악들이 신기루처럼 빙긋이 인사하고 사라진다.


연습이 제대로 안됐다고 선생님을 실망시킬까봐 오늘은 아프다고 거짓말을 할까 생각하다가도 오늘 안가면 영영 놓칠지도 모르는 내가 모르는 베토벤의 새로운 모습이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Good Morning Sir.”하며 레슨실 문을 열어 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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