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꺼운 손가락 Oct 19. 2020

비밀의 문

플라잉 휠체어 35화

한 달 만에 만난 선생님들은 여전했다.





35. 비밀의 문




약간 피곤한 듯 보이긴 했지만 어제도 신시내티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우리를 대했다.


“잘 지냈니? 자, 그럼 들어볼까?”

우리는 약속대로 암보로 연주했다.

아침 7시 30분에 이미 연습실에서 불 켜고 연습하고 있는 선생님들의 모습에 지난 한 달간 연습한 거보다 더 많은 걸 깨달았는지, 연주하는 내내 내 생각에도 어제 오후보다 훨씬 좋은 음악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마지막 화음이 끝나자 레빈 선생님은 너무나 큰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쳐주었다.


“아니. 어떻게 이걸 다 외웠어? 너희들 열심히 했구나. 너무 잘했다.”


선생님의 칭찬 한 마디가 너무 좋았다.

어찌 외울 것인가 망막하고 힘들었던 지난 몇 주간이 선생님의 이 칭찬 한 마디에 그 힘든 것이 싹 다 사라졌다.

다음에는 어떤 곡을 하게 될지 너무 궁금해졌다.


“너네 6월에 방학하면 무슨 계획 있니? 혹시 한국에 다녀오거나 그럴 거니?”

계획이라니. 우리한테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한국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혹시 6월에 아스펜 음악제에 가 볼 생각 있니? 거기 가면 정말 많은 음악가들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연주도 보고, 같이 연주도 하고. 아스펜 들어본 적 있지?”


아스펜. 왜 들어본 일이 없겠나. 아스펜 음악제는 음악도들이라면 꼭 가보고 싶은 축제다.

카네기홀이나 베를린 필하모닉 홀의 무대에서나 볼 법한 연주자들이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니고, 숲 속에서 학생들과 함께 연주를 하고, 그들의 연주를 어려움 없이 눈앞에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배울 수도 있다.


“잠깐만 기다려봐.”

주섬주섬 수첩을 찾더니 전화를 걸었다.

“하이. 도로시.”라고 시작하면서, 내 제자들을 이번 아스펜에 보내고 싶은데 자리가 있겠는지, 연주도 하고 레슨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 어떤 서류를 어디로 보내면 되는가. 뭐 이런 얘기였다.


설마 지금 통화한 사람이 그 유명한 줄리어드의 도로시 딜레이 교수*일까 싶었는데, 설마가 사실이었다. 이제는 이런 놀라운 일들에 어이없는 웃음만 실실 나올 뿐이다.

몇 차에 걸친 오디션을 통과하고, 비싼 참가비를 내야 갈 수 있는 아스펜 음악제를, 우리 선생님은 숙제를 잘했다며 갈 수 있게 해 주셨다.


“얘들아. 딜레이 교수가 받아주겠다고 하니까 이거 황제 다시 한번 녹음해서 녹음테이프랑 너희들 프로필이랑 만들어서 아스펜 사무실로 보내기만 하면 돼.”

메이어 선생님은 세심하게도 우리들의 교통비를 걱정해주셨다.


“여기에서 아스펜까지 가는데 넷이서 움직이려면 교통비가 보통 드는 일이 아닐 텐데. 내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학교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축하 연주를 하면 돈을 준다더라. 그걸 너희가 할 수 있게 하면 좋을 거 같아.” 하면서 이번엔 총장에게 전화를 거는 게 아닌가.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모두가 다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그 경계선을 여지없이 무너뜨리신다.

믿을 수 없고, 이상하고, 감사하고,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늘 내게 일어난다.


신시내티에서의 첫 해를 보내고 1983년이 되었다.

라살 선생님들과의 레슨은 이제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누구에게라도 레슨 한 번 받아보는 게 소원 일정도로 세상 더없이 힘든 일이었는데, 여기 와서는 매일매일도 모자라 하루에 두 번씩 받게 되는 날도 있다니 태어났으면 열심히 살고 볼 일이란 말을 우리끼리 자주 주고받았다.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삶을 근거리에서 훔쳐볼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행운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삶의 시간표를 콰르텟 연습에 집중하는 모습, 좋은 연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개인 연습시간, 특히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는 철저한 자기 관리를 지켜보면서 반성을 많이 하게 됐다.


나는 세계적인 음악가에 대한 대단한 오해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음악을 오래 해왔고, 연주 경험도 많으니 이제는 연습을 설렁설렁할 것이라는 오해.

해외 연주를 많이 다니니 연주하는 틈틈이 자유시간과 여행을 즐길 거라는 착각.

한 살 한 살 더 먹으면서 근육과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기본기 연습을 더욱 철저히 하신다는 말씀에 놀랐다.


연주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음악이 깊어지고,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더욱 넓어지는 반면에 과도하게 근육을 사용하다 보니 온 몸에 염증이 생기고, 손가락과 어깨가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이 연주에 영향을 미칠까 봐 아침의 콰르텟 연습 전에 스케일부터 충분히 몸을 만들어 놓는다고 말씀하셨다.


젊은 시절에는 유럽의 신기하고 아름다운 곳들에 관심이 많았지만, 연주자가 직업인 사람들은 오늘만 연주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있을 연주를 위해 오늘을 함부로 할 수 없고, 오늘의 연주는 한 잔의 칵테일로 충분히 축하를 다했다는 말씀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내 손끝에서 만들어진 음들이라고 해도 일단 내 손을 떠나면 듣는 이의 음악이 된다. 음이 틀렸다고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시험답안처럼 지워 고칠 수가 없다. 연주는 2시간 내내 체력과 음력, 집중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재주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꾸준한 훈련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라살 선생님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생기고 나니 선생님들이 제안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도 않고, 토를 달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장에야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도 하다 보면 이해가 갈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거 해볼래, 저거 해볼래라고 제안하시는 것은 무조건 열심히 해냈다.

신시내티에서의 삶은 버거웠지만 감사했고,


점점 더 즐거워졌다.


※ 딜레이 Dorothy DeLay 1917~2002 줄리어드 음대, 신시내티 주립대 교수였으며 20세기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를 길러냈다.

이전 05화 숙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