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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꺼운 손가락 Oct 16. 2020

숙제

플라잉 휠체어 34화

첫 학기가 끝나갈 무렵, 




34. 숙제



라살 콰르텟이 유럽 투어를 떠났다. 

선생님들은 해외 연주를 갈 때면 레슨 받을 때보다 더 많은 숙제를 안겨 주곤 했다. 

콰르텟의 숙제는 이거였다.


‘하이든 황제를 외워 놓을 것’


암기. 암기라…. 혼자 하는 협주곡은 30분짜리도 좔좔 외울 수 있지만, 현악 4중주는 얘기가 다르다. 

내 파트뿐 아니라 다른 파트 악보도 다 외워야 하고, 악보를 보면서 할 때도 호흡을 맞추는 게 쉽지 않은데, 암보라니. 생각조차 해보지도 않았다.


한 달 후 오전 8시 암기한 것을 가지고 레슨을 오라고 하셨다. 

30일간의 해외 연주를 후 다음날 오전 8시에 레슨을 하시겠다는 얘기인데, 내심 취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았다. 

적지 않은 나이의 선생님들이 20회가 넘는 연주. 긴 비행. 시차에 도착한 다음날 일상에 아무 지장 없다는 듯 아침 8시에 나오실 수 있을까? 

뭐. 피곤해서 취소되더라도 늦출 수 있는 시간은 최소 하루일 테니 꾀 피울 수 있는 여유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우선 스코어를 보며 전체적인 것을 살피고, 내 악보를 따로 외우고, 내가 연주할 때 다른 악기들의 화음, 리듬을 기억하고, 쉴 때는 박자만 셀 게 아니라 흐름을 타고 있어야 하고, 마치 음악을 글로 배우는 사람처럼 긴장에 긴장을, 다짐에 다짐을 하며 확인하고 외워나갔다. 


생각보다 음악에 더 깊이 들어가야 했다. 전체적인 구조가 좀 더 선명하게 잡혔고, 내 리듬 부분이 멜로디 라인에 어떤 효과를 주며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확연하게 그림이 잡혔다. 


일주일쯤 지나고 왠지 오늘은 악보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파트만 혼자서 해 볼 땐 아무 문제없었으니 이 정도면 합주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오늘은 한 번 악보 없이 해보는 거 어때?”

“그럴까? 나도 얼추 해볼 수 있을 거 같은데.”


멤버들 모두 일주일간 말도 안 하고 황제에만 매달려 있었던 차라 지겨워지기도 했고, 이만하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찰나였다. 


“우선, 중간에 맘에 들던 안 들던 간에 한 번 끝까지 가보자.”

“오케이.”

끝까지는 갈 수 있겠다 싶었던 생각은 교만이었다. 

1악장을 얼마 가지 못하고 엉망진창이 되었다. 

다른 파트 악보도 다 외웠다고 자신했는데, 연주를 하면서 상상하지 않았던 소리가 들리자 머릿속이 꼬이기 시작했고, 한 번 사인이 어긋나자 평정심을 잃었다. 

그래도 중심을 잡고 음악을 이어 가보려 했는데 집중이 완전히 틀어졌다. 


“야. 이거 생각하고 완전 딴판인데?”

“아까 거기 말이야. 재현부 나오기 좀 전에, 거기에서 약간 리타르단도를 하기로 했던 거 아니야?”

“맞는데. 생각해보니 출발 시점이 조금씩 어긋났어.”

“아이고. 이거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구나.”

“난 그래도 어거지로 끝까지 한 번은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우리. 할 수 있겠지?”

“다시 해보자. 이번엔 악보에 체크를 좀 하면서 해야겠어.”


나의 자신감과 교만함에 다시 한번 웃음이 났다. 

왜 매번, 이 정도면 충분히 준비가 된 거겠지?라고 생각할까. 

이 정도가 아니라 조금 더, 한 번 더가 필요한데 말이다. 


악보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을 다시 체크해서 될 때까지 연습했다. 연습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준비다. 

만 번을 연습했어도 연주 때에 틀릴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 삐끗하는 순간을 어떻게 다시 연결시키느냐는 그간의 연습량에서 나온다는 것도 점점 경험하게 되었다. 


내일이면 선생님들과 한 달 만에 만나는 날이다. 

누워서도 황제의 스코어를 떠올렸다. 

이번 숙제의 가장 큰 수확이라면 악보를 보는 눈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네 가지 악기의 움직임을 한눈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들이 바랐던 게 아마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빨리 레슨을 받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온 다음 날 아침 8시에 레슨을 한다는 게 무리이지 않을까? 

선생님으로부터의 취소 연락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저녁이 될 때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마. 내일 아침에 가서 보면 알겠지, 선생님들은 분명 늦잠을 주무실 테니, 우리는 기다리며 연습을 하고 있는 게 낫겠다. 이렇게 생각하며 레슨실로 향했다. 


7시 30분. 

오 마이 갓. 믿을 수가 없었다. 

주차장에 네 대의 차가 나란히 주차되어 있고, 연습실에는 불이 죄다 켜져 있고, 선생님들의 각자 연습하는 소리가 창문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많은 이들이 라살 콰르텟에 대해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존경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벼락이 떨어져도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는 콰르텟 연습을 한다. 

연주 다음날도 어김없이 9시에 연습을 한다. 그 연습을 위해서 7시나 8시부터 개인 연습을 한다. 콰르텟 연습시간에는 일체 외부의 연락을 받지 않는다. 

연습실 전화기 코드도 뽑고, 누가 연습실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는다. 이런 얘기는 수도 없이 많이 들어봤는데, 설마 한 달간의 해외 연주 다음날에도 이럴 줄은 몰랐다. 


라살은 이런 연습을 1946년부터, 아니 콰르텟 결성 이전부터 이런 연습 방식이 몸에 배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세계 최고의 콰르텟이라고 하는 데에는 이런 과정이 숨어 있었다. 

다른 도시, 유럽의 관객들은 라살의 음악만 들었을 테지만, 여기 신시내티 사람들은 라살의 삶을 보고 있었다. 


라살의 음악에는 일상의 힘이 있다. 

아마도 월드 투어를 하는 예술가들의 삶이 이럴 것이다.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하는 것. 

그것은 음악을 더욱 깊이 있고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흔히들 ‘예술가란 말이야….’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겉멋, 이런 척, 저런 척하는 것에 치중되어 있던가. 

연습할 때는 연습하고 놀 때는 노는 게 예술가라고 말하면서 노는 거에만 집중하고, 그나마도 연습의 절반은 머리로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사람들의 예술적 수명은 그렇게 길지 않다는 걸 많이 보면서도 그게 나한테도 적용되는 일이라는 걸 자꾸 잊게 된다. 


연습은 예술가를 덜 충동적이게 만들고, 감정을 평온하게 만들며, 예술이 곧 삶이 되게 한다. 


음악은 경쟁, 충동, 분노가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일상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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