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사람들 생김새도 비슷하고, 장애인들과 지내는 거라서 이질감이 많지 않았는데, 미국은 전혀 달랐다.
사람들 눈을 보려면 휠체어에서 올려다봐야 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고개를 들어 올리는 각도가 한국에서와는 너무 달라서 이틀이 지나니까 뒷목에 통증이 어깨를 타고 내려왔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말뿐이었는지 사람들이 우리를 자꾸 힐끗힐끗 쳐다보는 걸 느꼈다.
아시아인이어서 보는 건지, 휠체어를 타서 보는 건지, 아시아인이고 휠체어를 타는 데 여러 명이 몰려다녀서 보는 건지, 수군거리는 말들도 죄다 영어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여기저기 올려다보느라 목은 아프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으니 머리도 아프고 진짜 미국에 온 게 맞는 건지 현실감도 없고 정말 어리둥절 그 자체였다.
우리가 함께 살게 된 아파트는 정말 훌륭했다. 이제까지 내가 살아본 집 중에 이런 집은 없었다.
방문턱이 없고 카펫이 깔려 있으니 휠체어를 집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이것 하나만으로 집은 천국 같았다.
미국 집들은 원래 문턱이 없고, 다 카펫이 깔려 있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는데, 한국에서도 진작 이렇게 할 수 있었다면 사는 게 그렇게까지 고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이런 집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안에서만큼은 정말로 몸이 덜 피곤했으면 늘 바랬는데, 집 안에서도 휠체어를 탄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김태경 선생님은 학교에 가서 서류 절차를 확인하고, 선생님들을 만나고 우리에 대해 더 자세하게 얘기를 나누고, 수업 스케줄 표를 받아 왔다.
스케줄 표를 받아 든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일주일에 적게는 일곱 번, 많게는 열 번의 레슨이 짜여 있었다.
검정고시를 반드시 패스해야 했기에 없던 힘을 짜내 공부했었던 건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데….
처음부터 큰 목표들이 눈 앞에 있었다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겠지.
내 힘으로는 올 수 없는 길을 왔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지 싶다.
라살 콰르텟은 신시내티의 교수 겸 상주음악가고, 집중훈련을 위해서 한 해에 한 팀의 콰르텟, 많아야 두 팀만 제자로 받는다.
우리 전에 다른 연주자들은 대략적으로 1년 정도씩 선생님들과 함께 상주하며 레슨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들 중에는 에머슨*같이 라살보다 더 유명하게 된 콰르텟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처음 학교에 갔었을 때, 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우리를 너무나 궁금해했다.
아시아인, 장애인이라고 위아래로 훑어보다가도 라살의 제자라는 걸 알게 되면 바로 눈빛이 바뀌었다.
아예 대놓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라살의 제자가 된 거냐. 한국이란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거기 전쟁 났던 나라 아닌가? 어떻게 그런 나라에서 악기를 하게 되었는가. 누구의 추천서를 받았는가. 슈피러? 우리가 다 아는 그 슈피러?
슈피러의 얘기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는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라살은 언제 만났는가? 누가 소개했는가?
라살 콰르텟의 위치는 내가 상상한 이상이었다.
내 생각엔 푸르니에, 슈피러, 라살도 우리가 장애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악기를 하는 것이 기특해서 우리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했고, 제자로 받아줬고, 좋은 추천서를 써 준 것 같은데.
아무도 그 사실을 정확하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 아닌가.
여기 와서 다른 학생들의 심각하게 수준 높은 연주를 보니 그 생각이 틀린 게 아니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슈피러의 추천서를 받았데. 라살 선생님들이 쟤네들 졸업할 때까지 다른 제자는 안 받는다고 했데.
도대체 쟤네들은 뭐야? 어디? 한국? 그게 어디 있는 나라야?
얼마나 잘하길래? 베데스다라고 했지? 너네 연주가 언제니? 혹시 레슨 받는 거 보러 가도 돼?
맙소사. 우리의 실력을 들키기 전에 빨리 끌어올려야 한다.
펄먼의 음악 때문에 사람들은 펄먼의 장애를 보지 않게 되었다던 슈피러의 말이 떠올랐다.
우린 아직 그런 준비가 안 되었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이들은 우리의 장애를 아예 보지도 않으려 한다.
이건 전적으로 라살 선생님들의 책임이다. 선생님들은 신동옥 선생님의 추천과 우리의 가능성을 보고 뽑아준 것이지 우리는 아직 어느 수준이랄 것도 없는 팀이다.
이걸 어디 가서 말해야 하나. 학교 책자를 뒤져보니 라살의 역대 제자들 사진이 있다.
우리가 이 정도 급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우리 때문에 선생님들의 명예나 체면이 깎이는 건 아닐까.
이 책을 보고 있자니 학교 복도, 로비에서 우리를 쳐다보던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질투가 이해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아시안 장애인이어서 쳐다본 게 아니었다.
라살의 새 제자에 대한 부러움과 경계심이었다.
※ 에머슨 콰르텟 Emerson String Quartet 1976년 줄리어드 동창생들로 구성된 세계 최고의 현악 4중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