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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꺼운 손가락 Oct 21. 2020

강효 선생님

플라잉 휠체어 38화

뉴욕에서의 삶은 신시내티 때보다 여러 가지 난관이 많았다.




38. 강효 선생님



서울에서부터 우리를 살뜰히 보살펴주던 김태경 선생님은 신학생이 되어 다른 주에서 공부 중이시고, 요 몇 년 사이 나를 빼고 모든 멤버가 다 결혼을 해서 뉴욕에서는 각자 살게 되었다.

눈 깜짝할 새에 서른 살이나 되었고, 나 혼자만 가정을 꾸리지도 못했다.

다 같이 살 때는 아산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부족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돈을 나누어서 사용해야 하고 내가 사는 곳이 뉴욕이다 보니 순간순간 마음이 답답했다. 여러모로 초조해하는 나를 강효 선생님은 다독이며 잡아주셨다.


“올해 서른 살이라고?”

“네.”

“그래. 분명 적은 나이는 아니지. 그렇지만, 노력하면 아직 발전할 수 있는 나이야.”

“네?”

“어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없는 나이는 아니지 않겠니? 어릴수록 가능성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노력이 없다면 가능성은 그저 과거의 회한으로 남을 수도 있어. 너에겐 아직 기회가 있다고 본다.”


선생님은 당신의 악기 중 하나를 쓰라며 빌려 주셨다.

한동안 침울했었던 나는, 다시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었을 때도 내 곁엔 언제나 천사가 있었다. 나만 정신 차리고 일어서기만 하면 되게 모든 것을 만들어주셨는데, 나는 그새 그걸 또 잊고 있었던 게다. 나만큼 스승 복이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사람들 말처럼 뉴욕은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다. 굳이 경쟁구도로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마저도 경쟁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나를 다시 붙잡아 주셨다.


“그래 맞아. 사람들이 말하는 그게 맞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내 생각엔 말이다. 복잡하고 어렵고 답을 찾기 어려울 때에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거 같아.”


선생님은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문을 열어 주시곤 했는데,

“당분간 나랑은 기본 테크닉 연습만 해보도록 하자. 소나타나 콘첼토 그런 거는 이미 다 배웠잖아. 너 혼자 해도 돼.”


많은 사람들이 강효 선생님에게서 차이코프스키, 브람스,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콘첼토의 깊은 음악을 배우고 싶어 한다.

나도 그런 레슨을 기대했는데 기본 테크닉을 말씀하셔서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콘첼토 한 곡을 집중 분석하는 것보다 백만 배는 더 좋은 레슨이었다.


“내가 고민해봤는데 말이야. 악기 잡는 거부터 다시 찾아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자세가 자연스러워야 음악도 편안하게 나오는 법이니까. 그래서 말인데 어깨받침을 없이 연주해보는 건 어떨까?”

“어깨 받침을요? 이거 없이요?”

“응. 그래. 그거 없이 연주하는 사람들도 많아. 어깨받침을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어깨받침 악기 울림을 방해하기도 하니까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거도 방법이지.”

바이올리니스트의 99%가 어깨받침을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깨받침을 안 하면 쇠골이 턱받침 걸이에 닿아 뼈가 아프기 때문이다.

턱을 악기에 대면 악기 높이가 낮아서 공간이 남으니까 턱도 아프다.

어깨받침을 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고만 생각했지 어깨받침 없이 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보지 못했다.

답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을 때가 있다. 잠깐 망설이다가 어깨받침을 뺐다.

빼보고 불편하면 다시 끼면 되니까 빼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어라? 턱, 쇠골, 어깨가 하나도 아프지 않을 뿐 아니라 악기 높이가 내 목 길이와 딱 맞아서 오히려 더 편했다.

내 목이 짧은 줄은 알았는데 세상에 내 목이 이렇게나 짧은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목이 길어서 길이가 남으니까 그 길이만큼 어깨받침 높이를 조절해서 사용하는 거였는데, 나는 필요 없는 길이를 굳이 꾸겨 넣으니 오히려 불편했던 거였다.


“어때? 생각보다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편해서 어이가 없고, 내 목이 이렇게나 짧았나 싶어서 기가 막혔다.


“그리고 말이야. 어깨받침을 뺏으니 악기를 꼭 쥐지 않아도 될 거 같아. 왼팔이 정상이 아니라고 했잖아. 왼팔은 다 들을 수도 없고 힘을 쓸 수가 없는데 악기까지 꼭 쥐려고 하니까 왼팔에 무리가 갈 거야. 그러지 말고 너에게 맞는 악기 잡는 법을 찾아갈 필요가 있어. 악기를 잡는 정도란 없어. 각자에게 무리가 되지 않게 맞는 법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한 거야.”


악기 잡는 포즈를 다시 찾아가면서 너무 기뻤다.

그러잖아도 작년, 재작년부터 왼쪽 어깨와 팔에 무리가 가는 걸 느꼈는데 그저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다고, 악기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이 정도는 아픈 거 아니겠냐며 그냥 무시했었는데, 이런 방법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다음 시간에는 비브라토에 대해 대화했다. 정말 대화였다.

선생님은 늘 나의 생각을 먼저 물으셨다. 왜 그렇게 했는지, 어떤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셨는데,

생각이 많지 않고 단순한 내게는 곤란한 시간이기도 했다.

특별히 그렇게 연주한 이유는 없다. 그냥 그게 괜찮은 거 같아서였다.

비브라토를 처음 어떻게 배웠는지는 아예 기억에도 없었다.

그냥 왼손을 흔들어보라고 해서 흔들었지 않았을까?


“비브라토를 할 때에는 우선 손에 힘을 빼야 해. 음정 컨트롤을 하면서 하려면 말이지 손가락을 ….”

“소리의 연결을 위해서는 어떤 테크닉이 필요할까?”

“테크닉이요? 저는 그냥 연결하는 곳은 활을 붙이고, 아니면 떼고 그렇게밖에 생각을 안 해봤습니다.” 말이 점점 흐려지면서 대답에 자신이 없었다.


“맞아. 잘 알고 있네. 그런데 거기에 좀 더 좋은 소리를 내려면 활 잡는 방법을 달리해보는 것도 생각해보면 좋겠어. 악기 잡는 방법도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활 잡는 방법도 손가락의 각도를 바꾸면 다양하게 컨트롤할 수 있으니까.”

“현악기 연주자들은 포지션 이동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지. 너무 힘을 주고 움직이면 원하는 장소에서 손가락이 정지하지 못할 수도 있어. 줄을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타고 올라가 보면 어떨까? 아마 몸도 릴랙스가 되고, 스트레스도 덜 받을 거야.”


강 교수님의 레슨은 새로운 세계였다. 선생님은 많은 걸 쏟아내지 않으셨다.

한 번에 하나나 두 가지 정도만, 그것도 네가 하는 게 잘못됐으니 고쳐라가 아니라, 이런 방법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였다.


선생님이 제시하시는 방법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최상의 해결책이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웃는 낯에 언성 한 번 높이는 법이 없으셨다.

백 번을 해도 웃으며 기다려 주셨다.


30년 동안 들은 칭찬보다 2년간 들은 칭찬이 더 많았다.


“이야. 너는 어쩜 이렇게 보잉과 핑거링을 잘 만드니?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정말로 나보다 더 잘 만든다. 내가 너 거를 베껴서 쓰고 싶은데. 이거 브람스도 한 번 만들어볼래? 니 아이디어가 너무 궁금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웃기기만 하다. 서른 살짜리 어른 애였던 나는 이 말이 정말인 줄 알고, 몇 날 며칠을 낑낑거리며 악보와 씨름을 했다.


“와. 역시 니 핑거링은 기가 막히는구나. 좋은 아이디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혹시 이렇게 해보면 어떻겠니? 그러면 요 앞에서 네가 사용한 핑거링과 좀 더 연결성이 있을 거 같은데 어떠니?”


2년 동안 선생님의 이런 칭찬에 콧구멍이 벌렁거리고 어깨가 들썩이면서 내가 정말 뭐라도 되어가는 줄 착각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너는 콰르텟에서 세컨 바이올린을 하니까, 다른 누구보다도 기본 테크닉이 절대로 흔들리면 안 돼. 사람들이 말이야. 음악적 슬럼프에 빠질 때 많이 하는 실수가 기본기를 놓친다는 거야. 비브라토를 바꿔보고, 심지어는 악기도 바꾸고 뭐든 자꾸 바꿔서 새로운 분위기를 내고 싶어 하기도 해. 물론 어느 정도 도움은 될 거야.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아니란 건 금방 알게 되지. 그걸 해결해보겠다고 레슨 때마다 여기는 음 처리를 이렇게 하고, 저기서는 붙여보고 언제 그렇게 하겠니. 전체적인 것을 한 번에 고칠 수 있는 건 기본기라는 걸 잊지 않으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을 거야.”


30년도 더 전에 해주신 말씀들이지만, 강효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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