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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꺼운 손가락 Oct 21. 2020

아내

플라잉 휠체어 40화

부모님을 만나러 간 그녀는 일주일째 연락이 없었다.




40. 아내



집이 포항이라는 것도 지난주에 처음 알았고, 아무런 연락처를 모르니 어찌할 도리 없이 아무 데도 안 가고 전화기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기에 아무 연락조차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연락이 없는 걸로 보아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짐작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부모라도 이런 결혼을 허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연락이 없을 수가 있나. 살아있다고 정도는 알려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연락처를 알아내서 포항을 가봐야 하나. 가면 뭐라고 하나. 식구들이 내 모습을 보면 더 난리가 나겠지. 하루에도 수천 번을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지금 포항에서 고속버스를 타려고 하니 시간 맞춰 대전 터미널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몸은 괜찮은지, 부모님은 뭐라 하셨는지, 왜 연락을 못 했던 건지, 밥은 먹었는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고속버스에서 내린 그녀의 모습은 그동안 내가 상상했던 여러 가지 경우의 수에 전혀 없던 모습이라 너무 당황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노란 고무줄로 질끈 동여매고, 얇은 티셔츠에 있는 대로 구겨진 바지, 가방도 없고, 슬리퍼 차림에 자세히 보니 화장도 안 한 부스스한 맨얼굴이었다.

“내 몰골이 좀 그렇죠? 식구들한테 결혼하겠다고 했더니, 그 길로 오빠들까지 합세해서 저를 방에 가두더라고요. 그래서 연락을 못했어요. 일주일 있어보니 해결방법이 이것밖에 없을 거 같아서, 식구들이 다 나가고 어머니가 욕실에 들어가 계실 때 몰래 나왔어요.”

이 여자는 이런 얘기를 자기 보러 안 오냐고 할 때와 똑같은 어조로 말을 하고 있다.

“나요. 갈 데도 없고 있을 곳도 없는 데 재워 줄 거죠? 집으로 가요.”


이 여자는 내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여자지만, 이 여자는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고 있단 말인가.

친구 녀석들 몇몇이 결혼하는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일들을 겪었다고 했을 때 멀쩡한 여자 얻으면서 그 정도 노력도 안 하려 했냐며 비웃으며 넘겼던 순간들이 스쳤다. 절대 웃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는 걸 내 일이 되고 나서야 이해하고 있다.

친구 놈들 얘기를 기억해봤다. 어떻게 어떻게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번듯한 직업이라도 갖던가 어떻게든 자리가 잡히고, 애를 낳아서 잘 살고 있는 걸 보여드리지 않는 한 아내의 부모님은 마음을 절대로 열지 않았다고들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고, 어떤 약속도 할 수가 없다.

나이는 서른이나 되었지만, 난 아직 학생이고 그 마저도 공부가 끝나려면 몇 년은 더 있어야 한다.

지금 나는 이 여자를 책임질 능력이 없다. 그 능력은 어쩌면 영영 안 생길지도 모른다.

피곤에 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초롱초롱한 이 여자를 바라보며 쬐끄만 목소리로 너무 힘들면 없던 일로 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뭐라고요? 내가 집에서 어떻게 도망을 나왔는데, 남자가 돼서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해요?”라고 불같이 화를 내고 훽하고 우리 집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도무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온 몸이 굳어져 버렸다.

단 한 번 보고 결혼을 결심한 여자인데, 저 여인은 나 때문에 옷 한 벌을 챙기지 못하고 집을 나왔다.


지금쯤 포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우리 집인데 나는 차마 들어가기가 어렵다. 내가 그렇게도 바랬던, 완벽한 여자를 만났는데 나는 도무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집으로 들어가니 부모님과 나의 그녀는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짜가 있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다지 많지는 않은데, 요 며칠 어머니는 아침에 분이를 데리고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너무 궁금한데 감히 물어보기가 많이 겁났다.

사흘 정도 지나자 아버지는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를 불러 모았다.


“아버님. 강일이랑 분이랑 결혼식 준비가 얼추 되어갑니다. 날짜는 이달 6월 21일, 다다음주 일요일 11시 신신 예식장입니다. 신혼여행지은 제주도로 4박 5일 가는 걸로 다 예약해주는 데가 있어서 그거 예약했습니다.”

“잘했다. 잘했구나.”

“어머님. 그리고 청첩장을 우편으로 부치기도 하겠지만, 혹시 연락이 미쳐 못 닿을 수도 있는데 어머님께서 집안 어른들께 연락을 좀 해주시면 어떨까요.”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장손이 이렇게 이쁜 아가씨한테 장가를 드는데, 다들 내 죽을 때는 안 와도 되지만, 장손 결혼식에는 당연히 와야지. 누가 오고 누가 안 오나 내가 다 검사할 거다.”


할머니의 이런 엄포 때문이었는지 결혼식 날 하객이 1500명가량이 왔다. 어머니께서 아무리 생각해도 1000명이 넘게 올 거 같다며 남더라도 음식을 많이 해야 한다며 음식 주문을 늘리셨는데도 결국엔 모자랐다.

내 기억에도 없는 친척들까지 오셔서 어디서 이렇게 예쁜 신부를 구했냐며 축하와 덕담을 아낌없이 부어주셨다.

아내의 식구들은 단 한 명도 오지 않았지만, 하객이 너무 많아 신부 측 자리까지 앉고도 자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어쨌든지 간에 겉으로 보이는 모양새로는 전혀 이상함이 없었다.

사실, 결혼식이 진행되면서는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정신이 없어서 아내의 기분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내가 볼 때마다 활짝 웃고 있어서 아내도 나처럼 좋은가보다 했다. 내가 이런저런 얘기를 꺼낼 때마다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시고, 여동생이 애지 간이 눈치 없다며 눈을 흘기는데, 이 여자들이 왜 갑자기 동맹을 맺어 나를 못 잡아먹어 난리인가 싶었다. 둘째가 거들었다.

“거 형. 그만해요. 손님이 많이 와서 정말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조금만 살펴보면 죄다 우리 집 손님이란 거 다들 알았을 텐데 형수 맘이 그저 좋기만 하겠소.”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차 싶었다. 저 멀리서 아내가 이쪽을 보며 웃고 있다.

“조용히 해라. 큰 애 온다.”


만남부터 결혼식, 신혼여행 다녀오기까지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신혼여행에 돌아와서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혼인신고를 했지만, 서류가 진행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아내와 함께 갈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서 이렇게 단 시간 내에 그 누구보다도 가까워지고 모든 것을 함께 한 사람이 없었기에 잠시라고 하더라도 헤어지는 것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30년을 아내 없이 살았고, 아내를 만나게 된지는 두 달이 안 되었고, 함께 산 날은 고작 한 달이었는데, 아내가 없는 뉴욕은 너무 쓸쓸하고 힘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겨울이면 만날 수 있겠지 하다가도 밤이 되면 말할 수 없이 외로웠다.

이제껏 외로움이라고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데, 결혼식 사진을 들여다보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미친놈처럼 실실 웃다가, 말할 수 없이 감사해서 울다가, 과연 내가 이 여자를 책임지고 살 수는 있을까 걱정도 됐다가, 혹시 내가 아내에게 얹혀서 살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 또 피식 웃기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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