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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꺼운 손가락 Oct 23. 2020

귀국

플라잉 휠체어 42화

1988년 8월




42. 귀국



드디어 졸업했다.

국민학교 졸업장밖에 없던 내가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아내와 함께 귀국했다.


82년 가을,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내가 가져갔던 건, 내 휠체어와 바이올린, 옷 몇 벌이 전부였는데 88년에 귀국할 때에는 새 휠체어, 강효 선생님이 알아봐 주시고 돈도 빌려주셔서 사게 된 좋은 바이올린, 이삿짐을 정리하고 정리해서 버리고, 바자회에서 팔기도 하고 했는데도 5개의 이민 가방이 찢어져라 짐을 챙겨 왔다.


내겐 누구보다 아름답고 지혜로운 아내도 있고 딸도 있다. 언젠가 누가 저 집은 무슨 업보가 많아서 장남이 저런 병에 걸렸냐고 수군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못 듣는 줄 알고 속삭였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말은 더 크고 정확하게 들리는 법이다.

되는 일도 없고 마음이 너무 힘들 때면 가끔 그렇게 수군거리던 사람들 얼굴이 떠오른다. 사람들의 그런 말에 나보다도 더 힘들어하시고 부엌에 숨어서 우시던 어머니도 가슴 한 켠에 시리게 박혀있다.


나의 장애는 우리 집안의 원죄가 아닌데, 아닌 걸 알면서도 그런 말들은 마음이 약해질 때면 불뚝불뚝 치받쳐 올랐다. 내가 열심히 사는 것, 내가 받은 이 수많은 복들을 숨기지 않고 내어놓으며 사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귀국하면서 제일 마음이 아팠던 것은 베데스다가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구는 남아서 공부를 더 하기를 원했고, 누구는 귀국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콰르텟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되니까 그전까지는 좋은 바이올리니스트를 찾아서 베데스다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우리의 새로운 리더를 수소문했다. 88년 후반에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좋은 연주자들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 만나보면 대부분 피아노 트리오에는 관심이 있는데 콰르텟에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한 번은 어떤 유명 연주자와 연주를 할 기회가 있었다. 평소에 우리와는 레벨이 다른 연주자라고 생각했던 그가 우리와 한 번 해보겠다고 하니 놀랍기도 하고 기회를 얻은 것이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큰 기대를 가지고 연습을 해봤지만, 호흡을 맞추는 건 쉽지 않았다. 또 어떤 연주자는 몇 번 더 해보면 잘 될 것 같았는데, 프로필이 화려한 다른 연주자들이 피아노 트리오를 하자고 했다며 미안하다고 못하겠다고 했다. 팀의 리더를 찾는 게 생각보다 정말 어려웠다.


그러다가 박평섭이라는 걸출한 바이올리니스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서울대를 나와 독일에서 최고연주자 과정을 끝내고 오케스트라 악장, 챔버 연주, 여러 군데 음대에 출강을 하고 있었고 숨 쉴 틈 없이 바쁘면서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는 연주자였다. 독주회를 했다 하면 빈자리가 없는 연주자가 우리 콰르텟에 관심을 보였다는 얘기를 듣고 반신반의했다.


몇 번 만나 이런저런 살아온 얘기, 음악 공부를 해 온 과정, 결혼, 아이 별의별 얘기를 주고받다가, 삶에 대한 가치관이나 음악에 대한 철학에 공통점이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길로 함께 연습에 돌입했다.

그는 과연 훌륭한 리더였다. 따뜻하면서도 화려하고, 깊고 풍부한 소리를 가졌으며, 긴 호흡으로 곡을 해석하는 연주자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우리 멤버들을 연주를 잘하는 장애인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 동료로 대해준 인격자였다. 그는 처음부터 내 장애에는 관심도 두지 않으면서도 순간순간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그와의 연습은 정말 즐거웠다.


라살 선생님들이 말씀하신 콰르텟이란 어떻게 만들어져 가는 가에 근접하고 있는 팀이 다시 탄생했다. 미국에서 현악 4중주를 제대로 공부한 팀에 유명 솔리스트라 함께 하는 베데스다 현악 4중 주단은 단숨에 음악계에서 관심을 받게 되었고,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를 해도 3층까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관객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연주 일정이 잡히면 모든 일정을 마치고 밤마다 모여 새벽까지 연습했다. 몸은 녹초가 되고, 눈꺼풀이 턱밑으로 쳐지는 것 같아도 현악 4중주를 놓을 수는 없었다.

독일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해서 그런가, 박평섭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풍부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박 선생을 아들처럼 아꼈던 이화여대 김용윤 교수는 때때로 우리 연습을 보러 오셨다. 김 교수님은 풍채와 눈매만으로도 온몸에서 카리스마가 뚝뚝 흘러내렸는데, 매서운 눈으로 말없이 지켜보다가 마지막에 한 마디 정도만 나지막이 던지셨다.

“다 좋은데, 템포를 조금만 여유 있게 해 보면 어떻겠냐. 베토벤이란 게 원래 그렇게 급하지 않다.”


한동안 마치 한국 콰르텟은 베데스다밖에 없는 것처럼 공연장을 누볐다. 유학 떠나기 전에 여러 번 공연했던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은 물론이고 호암아트홀, 예술의 전당까지 1년에 몇 번씩 공연을 올렸다. 지방에서 초청하면 어디라도 다 갔다. 그때마다 언제나 매진이었다. 다른 홀들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니 그런가 보다 했는데, 2500석의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80% 이상 매표가 되었다고 해서 정말 놀랐다. 연주가 많고, 표도 잘 팔리니까 콰르텟에 피아노나 클라리넷, 다른 악기들을 하나둘씩 더 해서 하는 곡들의 연주자 섭외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다들 우리랑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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