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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꺼운 손가락 Oct 23. 2020

수원시향

플라잉 휠체어 43화

베데스다 활동과 앙상블 연주, 몇 군데 대학교에 출강하면서




43. 수원시향



한국의 음악계에 조금씩 몸을 붙여나갔다.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예고, 음대를 거치면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을 테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기에 연주를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한국의 연주자들이 너무 소중하고 반가웠다. 이때 만나게 된 연주자 중에 당시 수원시향 악장 김필주 선생이 있었다. 함께 앙상블을 연습하던 중 김필주 선생이 곧 수원시향 단원 오디션이 있을 예정인데 응시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다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는 않았기에 굉장히 뜻밖이었다. 실내악을 깊게 공부하신 분이 오케스트라에서 함께 연주하게 된다면 앙상블에 큰 도움이 될 거 같으니 한 번 도전해보라는 것이었다. 김필주 선생이 나를 과대평가한 거겠지만, 나로서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내게 그런 말을 해준다니 엄청난 도전이 되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길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약 되기만 한다면 지금보다 여러모로 삶이 안정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나는 딸 둘인 집의 가장이었다.


가보지 않고는 뭐라 말할 수 없지 않을까? 합격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연습을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어딘가에 지원하면서 합격이 보장되지 않은 채로 준비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신시내티도 브루클린도 입학제의를 먼저 해왔고, 장학금까지 약속받은 상황에서 입학서류를 준비했었는데 말이다.

합격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시험을 치른다는 게 생각보다 많이 떨리고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떨릴게 뭐냐고 자꾸 되뇌었지만, 그게 어디 사람 맘같이 되는 일이던가.

학생들이 떨려서 집중을 못할 때에는 호통을 쳐놓고 막상 내가 그 상황이 되니 컨트롤이 잘 되지 않았다.


입단 오디션은 먼저 실기 시험을 치르고 옆방으로 이동해서 면접을 보는 것이었다.

실기 시험은 지휘자와 악장, 외부의 유명한 연주자와 교수들이 채점을 하고, 면접은 시청 담당 공무원들이 진행했다.

음악계에서는 베데스다나 나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어색하지는 않았는데


문제는 면접장에서 일어났다.

휠체어를 굴리며 들어가자 면접관들이 위아래를 훑어보고, 서류를 훑어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나는 면접관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다들 고개를 숙이고 서류만 만지작거렸다.

내가 먼저 정적을 깨며 말했다.


“이강일입니다.”

“이강일 씨?”

“네.”

“오디션 보는 데 뭐 불편한 건 없으셨나요?”

“없었습니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강일 씨.”

“네.”

질문은 안 하고 왜 자꾸 내 이름만 부르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해 주면 좋겠다.


“만약 합격한다면 출근은 어떻게 할 겁니까?”


다른 면접관들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숙이고 나를 곁눈질로 보며 한숨만 팍팍 쉬었다.
이 질문을 왜 하는지 충분히 이해는 갔다.

당시 시향 연습실로 사용하는 시립 문화회관의 입구에는 30개가 넘는 계단이 있었고, 휠체어 엘리베이터는 고사하고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회전 길도 없었다. 당연했다.


일반 시민을 위한 인권이란 단어도 없던 시대에 만든 건물에서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나 배려를 기대하는 게 사치가 아닐까.

이 상황을 뒤집을만한 뭔가가 필요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만약 출근시간에 제가 연습실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그때 저를 해고하십시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대답이 튀어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며칠 후 수원시향 사무실에서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직장이란 걸 갖게 되다니.

장애인들 중에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니는 친구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직장이란 게 생겼다고 하니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른다.

미국에 공부하러 간다고 할 때는 좋은 마음 반, 걱정되는 마음 반이셨는데, 수원시향에 합격했다고 하니 어머니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셨다.


첫 출근 날이 다가오자 막연히 좋은 것보다는 그 계단을 어떻게 오르내려야 하는지가 실제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아내도 걱정이 한 짐이었다.

“내일 어떻게 해요?”

“응? 뭘 어떻게 해.”

“계단.”

“어떻게 되겠지.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첫날이니 같이 가겠다는 아내에게 내가 학교 가는 애냐며 화를 내다시피 하며 말렸다.

아내가 뭘 걱정하는지 모르지 않지만,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아내에게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연습시간보다 두 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어찌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거기를 가봐야 무슨 수가 생길 것 아닌가. 목발을 집고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는 녀석들이 정말 부러웠다.


시립 문화회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니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집이나 연습실에 갈 때는 누군가가 나와서 휠체어를 꺼내 줬는데, 여긴 아는 사람이 없으니 계단을 오르내리기 전에 차에서 내리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주여. 이를 어찌하오리까.

똑똑.

누군가가 내 창문을 두드린다. 나는 창문을 내렸다.


“이강일 선생님이시죠? 저는 수원시향 단원입니다. 제가 뭘 도와 드리면 될까요?”

“아. 예. 고맙습니다. 트렁크에 휠체어가 있는데요. 그걸 꺼내서 이 앞으로 가져다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휠체어 펴는 방법을 미쳐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척척 펴서, 운전석 앞에 바짝 붙였다. 그것도 내가 옮겨 앉기 가장 편하게.

휠체어에 옮겨 타자 악기를 들고 내 휠체어를 계단까지 밀고 갔는데, 단원들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우리 연습실 건물이 좀 불편한 게 많습니다. 저희들도 이 계단이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뭐. 조금만 있으면 새 연습실로 옮긴다고 하니까 조금만 견뎌보지요.”라며 나를 위로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출근 첫날로부터 퇴직하는 마지막 날까지 수원시향 단원들은 언제나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내 주고, 퇴근할 때는 넣어주고, 나를 만나는 그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시립 문화회관 시절 남자 단원들은 매일같이 나를 업어서 계단 위로 올려다 주고, 업어서 내려다 주었다.

나만 업는 걸로 일이 끝나겠는가?

무겁고 부피가 큰 휠체어까지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주었다.


지방이나 해외 연주 갈 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을 갈 때면 언제나 나를 업고, 내 악기 들고, 휠체어 운반하고 다녀 주었다.

동료들이 이렇게 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로 직장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던 내 마음이 주차장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똑똑 소리에 화르륵 열리고, 이 길디 긴 계단을 오르면서 말할 수 없이 벅찬 마음으로 여기서는, 이 연주자들과 함께라면 깊고 따뜻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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