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꺼운 손가락 Oct 23. 2020

플라잉 휠체어 41화

아내가 임신을 했다.





41. 딸



믿을 수 없었다.

나에게 아이가 생기다니. 너무 좋았다. 동시에 너무너무 무서웠다.

나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사람인데, 그런 내가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을까?


무심한 뉴욕 하늘은 너무나 파랬다. 살짝 보이는 저 가을 구름 사이로 하늘이 한 번만 얘기해주시면 좋으련만, 괜찮다. 다 잘 될 거다. 잘 살 수 있다. 구름으로 동그라미라도 그려주시면 좋겠다.


아이가 누굴 닮았으면 좋을까? 아내의 얼굴을 떠올려 봤다. 아내를 닮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퍼뜩 내 다리를 쳐다봤다.

물론 소아마비는 유전이 아니다. 소아마비 친구들의 아이들 중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들도 아무도 없다. 알고 있다. 내겐 소아마비에 관해 그 누구보다도 많은 의학적 지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감사하면서 동시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머리가 깨질 듯이 지끈거렸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불면의 날을 보내면서 기도했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걸어봤으면 좋겠다는 꿈은 버릴 테니 우리 아이의 다리를 지켜달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아는 의사를 붙들고 다시 물었다. 당연히 절대로 유전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혹시나 아빠의 큰 얼굴을 닮을 수 있으니 걱정하고 싶으면 그걸 걱정하는 게 훨씬 현실적인 일이라고 우스갯소리를 건네며 나를 다독이셨다.

거울을 봤다. 큰 얼굴도 별로 좋은 건 아니긴 하겠다. 아무리 의사가 그런 말을 했어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았다. 매일매일 기도했다. 이렇게 간절한 적이 없었다.


임신 6개월의 아내가 마트 계산대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못 자고,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손발이 부어서 주먹을 쥐지도 못하고, 신발은 신을 수도 없으면서 그거 몇 푼을 벌겠다며 나가겠다고 웃으며 말한다. 아내는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강했고 용감했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뭐해요. 당신은 아침은 안 먹고, 점심은 학교에서 먹고, 저녁도 어쩌다 먹는데, 가만히 있을라고 하면 뭣 하러 여기까지 왔겠어요. 걱정 말아요. 너무 집에만 있으면 우울하고, 몸도 무거워져요.”


아내 앞에서 나는 너무 작아진다. 아내가 왜 저러는지 너무 알기 때문에 무작정 말릴 수만도 없었다. 뉴욕의 물가는 너무 비쌌다. 재단에서 받는 장학금은 늘 빠듯하고 부족했다. 나 혼자 있을 때야 불 안 키고, 난방 끄고, 밥이야 대충 해결하면 됐지만, 하필 이번 겨울은 작년보다 훨씬 추웠다. 이번 학기까지만 고생하면 석사 학위과정이 마무리되니 조금만 고생하면 학위를 받아 귀국할 수 있다. 힘들겠지만 요 몇 달만 도와주면 마지막 독주회와 실내악 연주회를 잘 준비할 수 있겠다 싶어 한국에 보내지 않은 건데 어머니의 말씀을 들을 걸 그랬나 후회막급이다.


뉴욕 거리는 휠체어를 밀어야 하는 나보다 체구가 작은 임산부에 더 버거운 도시다. 사람들은 빨리빨리 움직이고, 한국에서는 노인이나 임산부에게 자리양보도 잘해주는데 여기는 절대로 그런 법이 없다. 지금에 와서 내게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최선을 다해 졸업시험을 준비하는 것, 아내와 아이가 건강하도록,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지난밤부터 아내의 몸이 좋지 않았다. 눈이 쾡하고 손발은 이상하게 부어오르고, 계단 하나를 오르는데도 숨을 가빠했다.

서울 추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이 바람 부는 날에 아내는 저 부른 배를 가지고 슈퍼마켓에 계산대에서 일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내가 뭐하는 짓인가 싶다.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데, 내가 쳐다보는 걸 느낀 아내는 빙긋이 웃으며 조그만 소리로 “괜찮아요.”라고 말한다. 괜찮은 게 하나도 없는데 괜찮다고 한다.


남들은 급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할 텐데, 내겐 그럴 무릎이 없으니 이럴 땐 이것마저도 나를 화나게 만든다. 밤새 끙끙 앓던 아내가 아침에 말했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할 거 같아요. 아이가 나올 거 같아.”


아직 2월이다. 예정일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아이가 나올 거 같다니, 내가 해야 할 일, 연락해야 할 곳을 알려주는 데도 계속 허둥지둥이다. 옷장 문을 여니 정갈하게 싸놓은 여행 가방이 바닥에 있다. 병원에 있을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 놓은 가방이란다.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해 놓은 걸까.


머나먼 타국, 최고로 추운 날씨, 친정 부모도 없이, 예정일은 한 달도 더 남았는데, 몸이 불편한 남편밖에 없는 내 아내는 지금 최악의 출산을 맞이하고 있다.


1988년 2월 3일

딸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아주 작은 인형처럼 누워있었다. 2.5kg밖에 되지 않아 백인, 흑인 애기들 사이에서 유난히 더 작았다. 조그만 아이가 빽빽 우는 데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 인생에서 이보다 더 기적 같은 일이 있을까.

조그맣고 조그만 저 아이가 내 딸이다. 나에게 딸이 생겼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쩌자고 저렇게 조그맣고 예쁜 천사가 내게 왔을까.


아버지께서 당신의 큰 손녀를 위해 이름을 지어주셨다. 닦을 수, 빛날 경. 修炅 이수경.

이름을 받은 날 너무 좋아서 허공을 향해 백 번도 넘게 이름을 불러봤다.


수경이와 함께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이것저것 부탁하는 일들을 잘해보려고 하긴 하는데, 한숨짓고 화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아내의 얼굴이 내 뒤통수를 찌른다.

아이는 좀처럼 잠을 자지 않았다. 정확히 2시간마다 사이렌 소리를 내며 세상 넘어갈 것 같이 얼굴 벌게지며 울었다. 아내가 분유며 아기 옷 등을 정리하고 챙길 동안만이라도 아이를 안고 있으라고 하는데, 사실 이 순간이 하루 중 가장 무서운 시간이었다.


아내가 내 팔 안으로 아이를 얹어주면 내 몸은 자동적으로 얼어붙었다. 이 조그맣고 예쁜 천사를 떨어뜨릴까 봐, 내 품 안에 있다가 잘 못 될까 봐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 딸이니까 너무 예뻐서 조금 꽉 안아보고 싶은데, 혹시 아이가 아파할까 봐 아이를 안은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팔 위에 둔 것 같은 모양새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으면 아내는 한 숨을 내쉬며 한 마디 했다.

“자꾸 안아봐야 서로 편안해져요. 남의 애 안으라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어려운 표정을 지어요.”


몇 주 사이에 나도 아내도 점점 표정을 잃어갔다. 나 혼자 살던 비좁은 공간에 아내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에는 좁긴 했어도 신혼이니까, 뉴욕이니까 이나마도 감사하며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셋이 되니까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애기는 팔뚝 길이밖에 안 될 만큼 쪼꼬 만데, 아이를 위한 물건은 점점 쌓이고, 우리 부부는 점차 녹초가 되고, 둘 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학교에서 하루 종일 음악에 시달리다가, 집에서 좀 휴식을 취해야 다음날 다시 연습을 할 수 있는데, 집에서는 아이 울음소리에 시달리니 어느 날인가엔 학교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수경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겨우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는 39도, 기저귀가 여기저기 나동그라져 있고, 카펫 위로는 수경이가 토해놓은 것 때문에 차마 표현하기 힘든 냄새가 진동을 하고, 아내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아이는 무엇을 해주어도 다 뱉어내고 울다 지쳐 잠이 들었고, 열은 내리지 않아 그 조그만 아이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손녀가 걱정되어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하시는 어머니가 아내에게 그러지 말고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나오라고 권유하셨다.

아내는 한 달도 안 된 아이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는 게 두렵다고 거절했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 점점 마음을 굳혀가는 것 같았다. 아이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당분간 수경이를 어머니께 맡기는 게 낫겠다고 하는데, 나는 어떤 의견도 낼 수가 없었다. 내 장애보다 내 무능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것 같아서 할 말이 없었다. 계속 이 상태로 살다가는 우리 모두 쓰러질 판인 것도 사실이고, 아이를 맡겨 놓고 다시 돌아와 내 졸업 독주회, 졸업 실내악 연주회 끝날 때까지 내 수발을 들겠다는데 결국 내 편의를 위한 결정이니 고맙다는 말을 내뱉기도 너무 염치가 없었다.


아내는 한국에 개나리가 피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들려올 무렵에 수경이를 안고 한국에 갔다가 개나리가 다 지기 전에 혼자 돌아왔다. 그러고는 마트에 다시 나갔다.


아내가 다시 마트에 일을 나가기 시작한 날, 나는 연습실에 앉아 펑펑 울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내와 아이를 책임지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었고, 이런 내게 저런 아내가 있다는 게 감사했다.

수경이 때문에 잠을 못 자서 있는 대로 짜증이 났었는데, 수경이를 보내자마자 너무 보고 싶어서 잠을 못 잤다.

나 때문에 그 어린것이 힘들게 비행기를 탔고, 결국 나 때문에 연로하신 부모님이 갓난아이를 키우시게 됐다.

남들은 아이를 낳으면 친정에 가서 몇 달씩 몸조리를 한다는데, 아내는 아이를 내려놓고 돌아와서 낮에는 마트에서 일하고, 또 나를 위해 집안일을 한다.


세상에 나같이 못난 놈이 또 있을까. 세상에 나같이 복 받은 놈이 또 있을까.

그날 나는 다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는 집사람이 돈 벌게 하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울며 맹세했다.


이전 11화 아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