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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꺼운 손가락 Oct 26. 2020

박평섭

플라잉 휠체어 44화

수원시향은 연주가 많아서 쉴 틈이 별로 없었다.




44. 박평섭



예중, 예고, 몇 군데 대학에도 출강을 하게 되었고, 그 틈에 베데스다까지 연주를 하게 되니 하루를 분단위로 쪼개 쓰지 않으면 이 스케줄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박 선생은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악장이었고, 나의 수원시향 연주가 묘하게 엇갈리면 콰르텟 연습시간을 잡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꾀가 나다가도 나보다 몇 배나 바쁜 박 선생이 우리 공연이 잡히면 여기에 매진하는 걸 보고 다시 마음을 다잡곤 했다.


92년 여름, 베데스다 콰르텟이 미국으로 초청을 받았다. 미국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다니 생각만으로도 너무 설레었다.


이번 연주가 내게는 위로의 시간이기도 하다. 20년 전 처음 미국에 갔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귀국 전의 전쟁 같았던 뉴욕 생활은, 지금에야 추억으로 꺼내 볼 수 있지만, 그때는 그 어느 때보다 힘들고 마음이 비참했었다.


첫아이는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났다. 나 때문에 아내는 산후조리도 못하고 마트에서 일을 했고, 만져보기에도 아까운 딸아이는 키울 능력이 없어서 부모님께 맡겼다.

공부를 빨리 마쳐야 돌아가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도시를 제대로 돌아본 적도 없었다. 저기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어도 단 돈 1불이 아쉬울 때니 어떤 여유도 사치였던 시절이 불과 몇 년 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끌어준 이 나라와 여기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에게 우리 팀의 근사한 음악을 자랑도 하고 싶었다.


미국의 관객들은 우리의 음악에 감탄했고, 친구들은 내가 금의환향이라도 한 듯 기뻐해 주었다.


2주간의 연주를 마치고 이틀 정도 함께 여행을 하다가 박 선생 부부는 2주 정도 더 여행을 한다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박 선생도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전라도 어느 도시에서 넉넉지 않은 형편으로 힘들게 악기를 배웠고, 서울에서도 독일에서도 가난한 유학생으로 녹록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이라고 했던가. 93년 봄 학기부터 교수 발령을 앞두고 결혼 후 부부만의 첫 여행을 계획했단다. 어찌나 좋아하던지 호텔 로비에서 활짝 웃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92년의 여름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기간이었는데 밤마다 응원을 하느라 잠을 설쳤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배드민턴에서 금메달을 땄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무한반복으로 틀어 주는 결승전을 마치 처음 보는 양 계속 보고 있었다.


이미 열 번도 더 본 경기에 심취해 있는데 아침 9시쯤 친구 녀석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박 선생이 아침에 뇌출혈로 죽었다는 것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며칠 전에 여행 잘 마치고 돌아왔다고 통화했었다. 10월에 있을 연주를 위해 다음 주부터 연습하기로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죽을 만큼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몸살감기 한 번 걸리는 걸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뇌출혈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누워있는 성모병원으로 달려갔다. 고인의 명단에 믿을 수 없는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서른아홉의 박평섭.

그의 깊고도 따뜻한 바이올린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게 사실일까.

많은 음악인들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모여들었다. 기가 막힌 죽음에 음악계가 침통했다.

누군가는 생을 달리했는데, 이 와중에 나는 이기적 이게도 베데스다를 생각했다.

어떻게 다시 일으킨 베데스다인데, 어떻게 찾아낸 우리의 리더인데.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네모난 사진 안에 있는 미소 띤 박평섭을 바라보니 가슴이 턱 막혔다.


아이고, 이 사람아 자네가 나이가 몇인데 그렇게 가버린단 말인가.

우리 모두 울고 있는데, 사진 속의 그만 빙긋이 웃고 있다.


죽음은 참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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