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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꺼운 손가락 Oct 26. 2020

직장생활

플라잉 휠체어 45화

수원시향 연습실이 인계동의 야외음악당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45. 직장생활


 

새 연습실로 옮기면서 여러모로 배려를 많이 받았다. 본 건물과 주차장은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나를 위해 연습실 건물 입구 바로 앞에 장애인 전용 주차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 때문에 오케스트라 연습실은 1층, 2층엔 실내악 연습실이, 합창단 연습실은 3층에 배치되었고, 건물 출입구 바로 옆에는 단원들 그 누구도, 설사 지휘자라도 거기에는 주차하지 않았다. 내가 출근할 때면 누구라도 뛰어나와서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내서 펴주고, 퇴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배려를 받으며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누가 또 있을까 싶다.


수원시향 단원이라면 누구나 휠체어를 접었다 폈다 하는 걸 할 줄 알았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앞으로는 신입 오디션 때 현장 과제로 휠체어 접었다 펴기도 넣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아무도 나의 상황을 귀찮아하지 않고 나를 이곳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대접해주는 동료들이 너무 고마웠다.


해마다 장애인의 날이 다가오면 나를 취재하러 온갖 방송사에서 왔다.

우리나라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국내 최고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20년 가까이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유일무이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방송국, 장애인 라디오 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공중파 케이블 할 것 없이 나와 동료들이 함께 연습하고 연주하는 모습을 찍기를 원했고, 동료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런 방송이 한 번 나가고 나면 전국 각지의 장애인들로부터 전화, 편지 등의 연락을 받는다. 어떻게 하면 그런 직장에 다닐 수 있는지, 나도 그런 직장을 다니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차별은 없는지, 방송에서처럼 사람들이 웃으며 대해주는지 별의별걸 다 묻는다.


장애인들만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몇 번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 방송은 청취자의 99%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훨씬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질문들을 받게 된다.

나도 굳이 에둘러 대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한다. 힘든 점, 감사한 점, 내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계획은 무엇인지 대해 있는 그대로 얘기하곤 했다.


내 방송을 듣고 삶의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었다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지방이나 시골에 갇혀서 사는 장애인들에게 내 삶은 신세계일 수밖에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60년대나 40년이 지난 2000년대나 아직도 장애인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친절하지 않다는 게 속상하고 분노도 치민다.

아직도 집안의 부끄러움이고, 방 안에만 갇혀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방송에서 나를 자꾸 찍으러 오는 게 처음에는 번거롭고 귀찮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나를 보고 힘을 얻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냥 숨을 일이 아니기에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한 번은 일본의 아시안 오케스트라 위크 집행부가 수원시향 연주를 보러 왔다. 아시안 오케스트라 위크는 해마다 일본에서 아시아의 유명 오케스트라들을 일본으로 초청해서 연주하고 교류하는 아시아에서 열리는 클래식 페스티벌이다.

수원시향을 초청할 계획을 세우고 왔다가 나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나를 반드시 포함해서 연주하는 것으로 초청장을 보내겠다고 했다.

개인적인 연주로 가는 거야 얼마든지 갈 수 있지만, 100명이 움직이는 해외 연주에 포함되는 것은 여러모로 부담이 된다. 해외에 가면 가방, 악기, 휠체어, 하다못해 식사까지도 혼자서 해결할 수가 없다.


내게 제일 힘든 식사는 호텔의 조식 뷔페다. 음식을 담으러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고민을 눈치챘는지 박은성 지휘자가 나를 따로 불렀다.

“혹시 일본 연주가는 거에 뭐를 준비하고 알아두면 좋을지를 말해주세요. 사람들이 잘 모를테니, 실수하지 않게 준비해두라고 일본 쪽에도 미리 요청을 하고, 우리 사무실 직원들에게도 얘기할께요.”

“제가 가는 게 너무 민폐일 거 같아 가도 되는지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 선생님 때문에 수원시향이 초청받은 건데. 다들 배려한다고 해도 이 선생님 입장에서 불편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우리 함께 갑시다. 일본 놈들이 우리 음악 수준과 여러 가지 의식 수준에 깜짝 놀란 거 아니요.”


해외 연주 기간 내내 여행가방, 악기를 들어주겠다고 담당을 자처한 단원들이 있었는가 하면, 남자 단원들은 단체 버스를 오르고 내릴 때마다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나를 들어 올리고 내리고, 휠체어를 번쩍번쩍 운반해주었다.


연주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이제 막 인지도를 높여 가고 있는 소녀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우리와 함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고,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으로 웅장한 마무리를 만들었다.


좋은 오케스트라, 촉망받는 피아니스트, 휠체어를 탄 단원까지 관객들과 다른 나라 오케스트라 관계자들에게는 여러모로 이슈가 되는 무대였다.


연주 후에 각 나라들의 연주자들이 다 같이 모이는 칵테일파티가 있었는데, 손열음과 사진 찍고 싶어 몰려가는 연주자들이 있는가 하면, 내가 궁금해서 말이라도 붙여 볼까 하고 한국 테이블을 기웃기웃하는 이들이 많았다.

어디서 공부했는지, 언제부터 수원시향에 있었는지 등등을 물어보면서 다들 하는 말이, 장애인이 악기를 하는 것은 많이 봤어도 프로페셔널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있는 것을 처음 봤다는 것이다.


일본, 대만, 홍콩, 필리핀 사람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나는 우리 오케스트라, 우리나라의 복지 수준, 복지의식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오랫동안 내게 꿈같은 나라였다. 암울했던 스무 살의 내게 꿈을 꾸게 해 주었던 나라가 일본이었다. 장애인도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현실로 체험하게 해 준 나라가 일본이었다. 한 사람이 하나씩의 휠체어를 가질 수 있는 게 당연한 현실이었다는 것도 벳부에서 처음 경험했다. 내 몸에 맞는 휠체어를 처음으로 제작해 준 곳도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준 곳도 일본이었다.


그랬던 일본이 오케스트라 연주자로 있는 나를 보고 충격을 받고 초청을 했으며, 어떻게 프로페셔널 연주자가 되었는지를 감탄해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런 예가 없다는 것이다.

뭐랄까. 기분이 묘했다. 가슴이 벅차고 뿌듯했다.

연주자라는 직업은 늘 무대에서 드러나는 일을 한다. 장애인은 뭘 하지 않아도 드러난다.

90명이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 무대에서 음악이 시작되기 전까지 나는 언제나 드러난다. 동료들과 함께 무대로 향해 나갈 때면 관객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고 있는 걸 느낀다. 그 덕분에 일본 연주까지 오게 된 것 아닌가.


내가 수원시향의 일원이 된 이유를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저 좋은 직장, 좋은 동료, 수준 높은 예술 활동에 그치게 하시려는 게 아니었다. 진정으로 더불어 사는 것, 건강하게 삶을 살아 내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증거가 되는 것, 나는 은혜의 통로가 되고 내게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연주가 많아지고 대중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아지니 사람들을 통해 이런 얘기를 더 많이 듣게 되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해서 이런 분위기가 감지되고, 이런 얘기를 들을 때면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아팠던 팔과 어깨가 번쩍번쩍 들려지곤 했다.


물론, 늘 기분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내가 단원으로 있었던 23년 동안 여러 명의 지휘자와 연주했다.

수원시향을 위해, 음악을 위해 단원들과 함께 호흡하며 헌신적으로 예술 활동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더러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지휘자 K는 스포트라이트가 조금이라도 자기를 벗어나면 불편한 심기를 쉽게 드러내곤 했다. 한 번은 수원시향이 장애인의 날을 기념하는 연주를 하게 되었다. 내 자리는 원래 세컨 바이올린 맨 앞이었는데, 연주 날 리허설을 하러 와보니 내 자리가 맨 뒤로 바뀌어있었다.


자리가 어디든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어느 위치에서든 내 소리 같으니까. 그게 프로다. 오케스트라에서는 악장이나 타이틀이 아닌 이상에는 필요에 따라 자리가 바뀌기도 하니까 어디에 앉든지 그건 상관없었다. 그러나 어떤 오케스트라도 예고 없이 함부로 자리를 바꾸지는 않는다.

상의 없이 내 자리를 맨 뒤로 바꾼 그의 의도를 너무나 알겠기에 분노를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나뿐 아니라 다른 단원들도 웅성대기 시작했다.

‘장애인의 날 기념 음악회’라고 플랭카드도 붙어있어서 단원들은 나보고 협연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건네고 있었는데, 정작 음악감독은 관객이 연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무대 문 열자마자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 휠체어를 밀고 앞으로 나오는 수고도 없고 여러모로 좋지 않냐는 것이다. 나를 배려하는 것처럼 얘기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뒤에 앉겠다고 했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장애인 대우를 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유치한 짓이냐고 항의해봐야 그와 말싸움하게 되고 그럼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싫었는데 동료들이 나보다 더 화를 내고 있는 걸 보니 스르륵 화가 가라앉았다.


 ※ 손열음 1986~.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 입상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평창대관령음악제 감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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