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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빨간 냉장고 그 집

바보들

by SuN ARIZONA

어린 시절, 아빠가 월급을 받아오시면 엄마는 손에 침을 발라가며 돈을 세었다.

얇은 노란 봉투에 두툼하게 담긴 돈은 만 원부터 오천 원, 천 원, 동전까지 다양했다.

두터운 지폐 뭉치를 반으로 접어 하나, 둘, 셋, 넷... 중얼거리시며 기계처럼 촥촥 넘기셨다.

나는 옆에 앉아 속으로 따라서 세면서 구경을 했다.

두 어번 더 세어 급료명세서와 맞게 담겨 있는지 확인이 끝나면, 거기서 몇 장을 꺼내 동네 식육식당으로 갔다.


그곳은 아빠의 동창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등하굣길에 지나쳐 가야 하는 그 집은 정육 냉장고 안이 길에서도 보였는데, 빨간 불이 켜진 채로 가장자리에는 하얀 성애가 사철 끼어 있었다.

중앙엔 쇠 파이프를 따라 커다란 고깃덩이들이 쇠고랑에 걸려 있었고, 살을 발라내고 뼈만 남은 소인지 돼지인지 모르는 몸통의 어느 부분들도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 무시무시한 안에 뭐가 들었는지 흘깃하며 지나다녔다. 그러다 주인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치면 씩씩한데 착해 보이는 정도의 인사를 했다.


"응 학교가냐?. 잘 갔다 와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입구에 버티고 있는 빨간 냉장고를 통과해 우리 가족이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식당 안은 비릿한 냄새가 돌면서, 차돌 박힌 대리석 바닥이 기름에 젖어 있었고, 마치 동물의 몸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티브이 아래가 매 번 앉는 자리였는데 나는 냉장고를 등 지고 앉았다. 내 뒤에 있는 살벌한 것들만 무시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다면,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아빠와 웃으며 무슨 무슨 이야기를 정겹게 하면서 고기를 내오셨다.

'아빠도 친구가 있구나...'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도 얌전히 앉아있었다.


다섯 개쯤 되는 원형식탁에는 부르스타가 하나씩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위엔 검은색 불판이 있었다.

불판은 은박지가 기름골 모양으로 제대로 각을 잡고 손님 맞을 준비 중이었다.

반짝거리는 은박지 위에 직사각형 삼겹살이 올려지면, 더 이상 가게 안에 비릿한 냄새와 불 빨간 냉장고도 생각나지 않았다.

치이이.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와 냄새에 침을 몰래 꼴깍 삼켰다.

군침이 도는 것을 누가 알아채는 것도 창피한 나이였다.

바삭하게 구워진 삼겹살은 콩가루에 찍어 쌈을 싸 먹었고 그런 날엔 아빠도 소주 한잔을 곁들이셨다.


언니는 비계가 싫다며 양손에 젓가락을 하나씩 나눠 잡고 살코기만 발라 먹었다.

그 모습이 왠지 멋있어 보여 나도 언니를 따라 비계는 못 먹겠다고 말했다.

설겅거리고 익숙하지 않은 질감이기는 했다.

결국 남은 비계는 모두 아빠 몫이 되었고, 아빠는 남은 비계를 집어 드시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바보다 바보"




이곳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한다.

기름기를 소주로 눌러줘야 볶음밥까지 먹을 수 있어서다.

기름 연기 가득한 골목에 들어서니 확신이 들고, 고소한 냄새가 폐로 들어오니 애간장이 탄다.

늘 그렇듯 이미 테이블은 거의 차 있지만 내 먹을 자리는 있다.

은박지 깔린 네모난 불판에 홀린 듯 테이블에 앉아 물수건으로 손부터 닦는다.


삼겹살 단일 메뉴.

문 앞에서 사장님이 인수를 확인 후 숭덩숭덩 썰어 내오신다.

나는 육겹살이라고 부르는데 비계와 살코기가 건반처럼 쌓인 고기는 단단하고 윤기가 난다.

지방은 하얗고 고기는 연분홍색이 돌아 참 곱다.

새색시의 연지곤지를 보고 있는 새신랑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빛깔 고운 그것들을 둘째 이모 같은 분이 오셔서 살갑게 구워주신다.

"이모, 참한애로 일 병이요"

안단테의 속도로 노릇노릇 익어가면 조바심이 나서 소주 먼저 깐다.

갓김치에 한 잔. 시래기 된장국에 한잔. 또 한잔.

베테랑 이모 세 분이 웃는 낯으로 거들어 주신 덕에 마늘 한쪽도 태우지 않고 잘 먹었다.


'아빠, 이제 저는 비계도 맛있게 먹고 소주도 곧잘 마셔요. 바보가 아닌 어른이 되었어요'


다음 답사지는 또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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