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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부지의 손맛을 닮은 곳

그때 그 씨암탉 이야기

by SuN ARIZONA Jan 07. 2025

 

 어릴 적, 혼자 버스를 탈 수 있을 만큼 자란 어느 날의 기억이다.

오전 수업만 하던 수요일, 방과 후면 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120원. 주머니 속에서 그 동전을 꼭 쥐고한 시간에 한 번씩 오는 13번 버스를 기다렸다. 그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면,  죽림이라는 부락에 있는 한아부지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흙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동네의 맨 끝집이 나왔다.


 한아부지집에는 송아지만 한 씨암탉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요상하게도 인기척이 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건 그 씨암탉이었다. 녀석은 마당을 자기 집으로 여겼는지, 보초라도 서는 것 같았다.  대문을 열 때부터 긴 철문 틈으로 그늠아의 위치를 살피는 것이 필수였다. 빈 마당으로 확인되면 재빨리 마루 위로 뛰어들어가야만 했다. 그건 마치 나만의 관문 같았다.


녀석은 내가 마당에 들어서기만 하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내가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갑자기 두 날개를  활짝 펼치며 날아올라 막 덤비고 쪼아댔다. 특히 혼자 있을 때를 더 노렸다. 마당에서 혼자 놀다 보면 느닷없이 나타나 나를 기습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느 날, 마루 끝에 세워진 수수 빗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빗자루를 움켜쥐고 배수진을 치듯 마루 끝에 서 녀석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푸드덕 푸드 드드득’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빗자루를 사방으로 휘둘렀다. 녀석은 잠시 움찔하는가 싶더니, 도망도 가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내려다보며 당당히 날개를 퍼덕였다. 쪼그마한 내가 그만큼 만만해 보였던 모양이다.


 

추석 하루 전, 한아부지가 뒤안 수돗가에서 닭을 손질하고 계셨다. 닭이 올려진 두꺼운 나무도마는 가장자리를 제외하고는 칼자국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가운데는 조금 파여 있었다.


한아부지는 닭을 뒤집어놓고 무쇠 칼로 배 한가운데를 가르셨다. 뼈가 뚝뚝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손놀림은 거침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무섭지는 않았다. 쫄쫄 쫄 수돗물을 틀어놓고 흐르는 물에 내장을 정리하셨다.

먹을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분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바구니에 옮겨 물기를 빼셨다.

나는 한아부지의 어깨너머로 그 과정을 지켜봤다. 그런데 닭 뱃속에서 아직 달걀이 채 되지 못한 작은 알들이 예닐곱 개나 나왔다. 그날 이후, 늘 나를 괴롭히던 그늠아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정소암식당은 한아부지의 손맛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현지인 맛집이라면 꼭 있어야 할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무심한 한아부지가  서빙하지만, 반찬은 한 상 가득 푸짐하게 나온다. 주방 안에는 무림의 고수 같은 할머니가 계신다. 간간히 부엌 쪽에서 들려오는 진한 사투리는 식사에 정겨움을 더한다.


 이 집의 대표 메뉴는 닭 내장탕이다.

빨간 국물 속에 작은 알들 보자, 그때 그 마당을 활보하던 그늠아가 생각났다. 닭 내장탕 한 그릇에 담긴 깊은 맛은,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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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11번가 더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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