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둘째 딸
1편에 이어
가마솥은 집의 중심이었다.
"부삭 위에는 올라가지 마라"
할머니는 가마솥 주변을 윤이 나게 닦으시면서 늘 주의를 주셨다.
부삭 위 한쪽에는 조롱박 모양의 항아리가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그 항아리도 같이 닦으셨다. 주둥이는 솔잎으로 막혀 있었고, 어린 눈으로 그 안이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러다 명절이 돌아오자 가자미회 무침을 할 때 반 사발 정도 따라 쓰시는 것을 보았다. 종갓집덕으로 친척들이 먹고 남은 막걸리를 부어놓은 것이었다.
나는 장작 사이사이를 공기가 통하게 드놓으면서 타지 않은 나무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솥뚜껑 틈으로는 무쇠눈물이 흘렀다 말랐다 한다. 물이 소리도 없이 폴폴 끓으면 할머니가 명주천으로 돌돌 감긴 뚜껑 손잡이를 힘겹게 한쪽으로 밀어젖히셨다.
시커먼 솥뚜껑이 열리면 수증기가 솟구쳐 온 부엌이 연기로 가득 차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천장의 새까만 서까래와 십 촉짜리 전구다마도 한몫 거들었다.
한 김 나간 솥 안에 끓는 물을 퍼내고, 그 자리에 불린 쌀을 부으신다.
연기 속에서 쌀바가지를 싹싹 긁고 솥뚜껑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아궁이 속을 살피면서 부지깽이로 불을 다독이고 두꺼운 장작 두어 개를 조심스레 얹었다.
불길은 곧 잦아들었고 잔불 곁에 세워놓은 내 운동화도 김을 내며 잘 말라갔다.
드디어 밥 되는 냄새가 돌기 시작하면 불가에서 나와 씻었고 그때쯤이면 어김없이 배가 고팠다.
동그란 양은 밥상에 나물 반찬, 시래기 된장국
우리 셋.
모두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뚝딱 식사를 마쳤다.
할머니는 양동이에 받아놓은 따뜻한 물로 설거지를 끝내고, 가마솥에 남은 밥을 보온밥통으로 옮기셨다.
그리고 긁어모은 누룽지는 복 자가 양각된 스텐찬합에 담았다.
절반은 활명수를 달고 사시는 한아버지의 숭늉 몫, 나머지 절반은 내 몫이었다.
구멍가게 하나 없는 시골.
십 리 사탕이라도 사려면 버스 두 정거장을 걸어가야 했다.
그런 집에 무슨 아이 먹일 것이 있었을까.
돈벌이 시원찮은 장남의 장녀도 아닌 둘째 딸.
나를 맡은 조부모의 마음과 그 무거운 책임을 어린 나는 어림조차 할 수 없었다.
소쩍새 우는 긴긴 겨울밤.
할머니는 팔각모반에 누룽지를 담고, 흰 설탕을 소복이 뿌려 내놓으셨다.
하얀 눈이 덮인 듯한 누룽지는 한 입만으로도 꼬숩고 다디달았다.
그러다 아랫목에 엎드려 밀린 그림일기를 다 못 쓰고 잠이 들었다.
따뜻한 아랫목에 스며든 그날의 온기를 가져와 수묵화 같은 오늘 내 마음을 데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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