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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 도서관장 Oct 30. 2022

보라 축제


드디어 머루가 보라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축제 기획도 물이 올랐다. 심심하고 밋밋한 책 축제 말고 우리가 먼저 신나고 즐거운 축제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잘 익은 머루 색을 떠올리며 보라 축제로 이름을 지었는데 부를수록 신통방통한 이름이었다. 삶을 보라. 오! 부르고 보라. 와! 뒹굴고 보라. 세상에! 먹고 보라. 대박! 즐기고 보라. 무릎을 탁 쳐가며 축제의 코너를 만들었다. 이왕이면 옷도 보라색으로 입어보자! ‘드레스코드 보라!’를 추가했다.


  <삶을 보라!>는 '읽고 쓰고 느끼고 먹고 의심하고 보는 삶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인문학 특강을 기획했다. 도서평론가에게 읽고, 글쓰기 강사에게 쓰고, 아트 에세이스트에게 느끼고, 요리하는 번역가에게 먹고, 과학자에게 의심하고 보는 삶에 대하여 강의를 요청했다. 흔쾌히 수락한 다섯 명의 강사들이 강의 내용보다 드레스코드를 더 고민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부르고 보라!> 축제에 음악이 빠지면 안 되는 법. 싱어송라이터와 함께 음악으로 쓰는 기행문을 준비했다. 공연장 가기가 쉽지 않은 동네 사람들에게 근사한 노래 선물이 될 것이다. 가수 섭외도 한 번에 성공했다.    


<뒹굴고 보라!>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제대로 한 판 뒹굴고 놀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몸으로 놀기, 연극으로 놀기를 기획했고, 도서관과 바로 뒤의 공원을 경계 없이 뛰어다니면서 노는 ‘우리들의 놀이터를 만들어 보라!’를 구상했다.


<먹고 보라!> 축제에 먹거리가 빠지면 얼마나 아쉬운가. 다행히 든든한 후원군이 있었다. ‘맛의 기억, 엄마의 음식을 기록하다’에 참가한 사람들이 봄부터 당신들의 엄마표 음식을 만들면서 레시피와 기억을 담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먹고 보라, 엄마의 음식을 팝니다!'를 계획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쉽게 맛볼 수 없는, 이야기가 담긴 엄마의 맛’을 선보여 드릴 기대에 부풀었다.  

        

보라 축제의 하이라이트 <즐기고 보라!>에서는 '나의 덕질을 보라!' 코스프레 경연대회를 열기로 했다. 좋아하는 책과 영화의 등장인물로 변신한 사람들 중 심사를 통해서 푸짐한 상품을 선물하기로 했다. 선물은 우리동네 농협에서 쌀을 후원받기로 했다. 심사위원은 도서관 근처 초등학교 학생들을 추천받았다. 시상은 쌀을 후원해준 동네 농협조합장님이 해주기로 했으니 걱정없다. 조합장님이 어떤 복장으로 나타나실지가 몹시 궁금했다.

        

문의 전화가 넘실거렸다. 재미있는 축제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보라 축제에 오려고 벼르고 있다는 말이 들렸다. 직원들도 드레스코드를 준비했다. 한 직원은 보라 죄수복을 구입했다. 구제시장을 이 잡듯 뒤져 보라 아이템들을 찾았다. 축제 준비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구나. 오겠다는 손님들도 준비하는 사람들도 신이 났다. 난관에 봉착하면 ‘일단 하고 보라!’를 외쳤고 마법처럼 막힌 일이 풀렸다.       

   

  축제 일주일 전, 카운트다운에 돌입하려는데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옆 동네에서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심각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 동네 모든 축제가 잠정 중단되었다. 마지막까지 버텨볼까 고민하다가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이듬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바람에 보라 축제는 기획에 그치고 말았다.


한 동안 야속한 바이러스 때문에 속이 상했다. 내 인생의 가장 멋진 이벤트 중 하나가 될 축제를 바이러스가 망치다니.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여기저기서 보라 축제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보라 축제는 성공한 축제였다. 비록 열리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이미 충분한 설렘과 즐거움을 선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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