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왕가위가 보여주는 홍콩의 공기

영화 <화양연화> 속 빈티지 공간

<해피투게더>, <중경삼림>, <아비정전> 등 왕가위 감독의 작품은 뛰어난 미장센에 비해 스토리는 다소 빈약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처럼

<화양연화>에서만큼은 스토리까지 꽃을 피운 걸작이 완성되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꽃 같던 시절이라는 말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쓸쓸한 말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너무나 애틋하고 처연해져서 이보다 어울리는 제목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영화 <화양연화> 속 빈티지 공간

1. 왕가위만의 몽환적인 분위기
2. 숨 막히게 좁은 공간
3. 홍콩의 날씨와 공기

1. 왕가위만의 몽환적인 분위기

공간에는 패턴이 있는 벽지나 커튼을 강렬한 색상으로 선택하고, 소파와 쿠션은 대조적인 색상으로 배치하여 시각적 충격도 선사한다. 이런 색감은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 수도 있지만 때로는 로맨틱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조명은 주로 노란빛과 붉은빛을 사용해 은은하게 비춘다.

이 영화에서는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약 4년 사이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흐름대로 친절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잘게 파편화시키고, 이야기를 일부러 섞어서 영화를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한다. 두 주인공은 서로의 상대 배우자들 간의 불륜으로 인해 처음에는 피해자로서 연대한다. 그리고 그들이 왜 사랑에 빠졌는지 연기를 해보다 자신들도 사랑에 빠져버린다. 주인공들조차 연기와 현실을 그리고 스스로의 감정도 구분하지 못하게 혼돈시킨다. 왕가위만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2. 숨 막히게 좁은 공간

© Miramax/Everett Collection

홍콩이라는 도시의 강한 특징 중 하나는 좁은 공간과 높은 인구 밀도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나 숨 막히게 좁은 공간을 절묘하게 담고 있다. 좁은 계단, 좁은 복도, 벽하나를 두고 서로의 사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이웃사이까지. 진부인은 이런 좁은 공간을 견디지 못하고 국수를 사러 나가고, 그 찰나에도 좁디좁은 계단을 통해 주 씨와 스친다. 이 좁은 공간 속에서 사랑은 피고 지는 것이다. 상대 배우자들의 얼굴은 보여주지도 않으며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너무나 실용적이면서도 왕가위밖에 할 수 없는 연출이 아닐까 싶다.

3. 홍콩의 날씨와 공기

© Miramax/Everett Collection

90년대 홍콩은 영국과 중국이 묘하게 섞인 그들만의 도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습한 날씨와 담배 연기, 안개, 거울 속 먼지까지 주인공들의 끓어오르는 감정과 함께 홍콩만의 공기를 형성하고 있다. 영화 속에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비추지 않고, 종종 거울이나 창문으로 그들을 반사시킨다. 커튼이나 먼지로 뿌옇게 연출해 특유의 습한 공기를 만들어 낸다. 마치 90년대 홍콩의 공기를 비현실적인 느낌까지 들만큼 매력적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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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는 99분의 짧은 영화지만, 어느 영화보다 묵직하다. 불륜의 피해자였던 주인공들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들은 스스로 좌절하게 된다. 그들의 사랑조차 흔해빠진 불륜이 되어버리기에 그 사랑을 부정하기 위해 추억으로 묻는다. 앙코르와트에서 비밀을 봉인하고 잡초로 덮는 마지막 장면은 그 어떤 사랑영화보다 심적으로 가라앉게 된다. 거대한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한낮 인간의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