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은 아씨들> 속 빈티지 공간 탐구
그레타 거윅만의 유머를 사랑한다. 영화 <레이디버드>나 <프란시스하>처럼 그녀가 각본을 쓰거나 감독을 한 영화에는 그레타 거윅이 투영되어 보이는데, 이번에 소개할 영화 <작은아씨들> 만큼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원작과 원작자 루이자 메이 올컷에 대한 존경이 각색으로 담긴 작품이었다.
「작은 아씨들」은 다들 어린 시절 책으로 먼저 봤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했고. 사실 이런 가족 이야기가 주된 내용인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모험 이야기도 아니고, 전쟁이나 세계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라 밋밋하다고 느꼈던 것. 내 생각과 똑같은 질문을 영화 속 조가 말한다. "대체 누가 집안에서 투닥거리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중요하다고 할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책이 쓰이지 않는 게 아닐까?" 여기에 막내 에이미는 이렇게 말한다. "그 반대가 아닐까? 안 쓰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거 아닐까? 책으로 쓰면 그 중요함이 부여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해." 나를 되돌아보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여기서 자리를 고쳐 앉고 이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영화 <작은 아씨들> 속 빈티지 공간 탐구
1. 시간 구성의 재배치
2. 가난하지만 따뜻한 마치 가문의 보금자리
3. 크리스마스 식탁
나는 이 영화를 2019년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보았다. 당시에는 책을 본 지 오래여서 그런지 시간의 흐름이 뒤섞이는 부분이 애매하게 보여서 좀 혼란스러웠다. 원작 소설에서는 1,2부로 나뉘고, 1부는 네 자매의 어린 시절, 2부는 몇 년 후 네 자매의 성장 이후 이야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소설 속 1,2부의 내용이 비슷한 상황이나 인물의 상황에 따라 교차적으로 나온다. 심지어 아역을 따로 두지 않고, 같은 인물이 똑같이 연기하다 보니 더 헤맸던 것 같다.
당시 혼란스러웠던 이 영화가 지금 다시 보니, 너무나 섬세하게 보였다. (그렇다. 이 영화는 무조건 두 번 이상 관람하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 영화는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과거를 떠올릴 때 과거에 대한 후회나 그리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과거는 필름 카메라 같은 뿌연 빈티지 질감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내긴 하지만. ) 현재와 과거를 독립적인 이야기로 평행선을 그으며 나아간다.
원작에서 후반부 가장 큰 반전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기도 한 조와 로리, 그리고 에이미의 사랑이야기도 이 영화에서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식으로 가벼운 터치만 있을 뿐이다. 이 영화의 주요 관심사는 각각의 자매들이 어떤 남자와 커플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네 자매들의 인생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색다른 점은 로리나 큰 고모의 대저택보다 아늑한 마치 가문의 집이 더 좋아 보인다는 점이다. 일부러 의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 나오는 부잣집들은 화려함보다는 온기를 느끼기 어려운 텅 빈 공간처럼 보인다.
반면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네 자매의 집은 가난하지만 따뜻하다. 연극을 하며 노는 다락방이나 크리스마스 장식을 꾸미며 수다 떠는 거실, 소박하지만 옹기종기 앉아 식사를 하는 식탁 등에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옆집에 사는 부잣집 소년 로리가 그토록 마치 가문에 속하고 싶어 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화목한 가정을 부러워하고 동경했던 것이다.
배경은 19세기 미국 남북전쟁 시대가 한창이던 시절이다. 마치 자매들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전쟁에 나가 어머니와 근근이 살고 있었기에 크리스마스 식탁 역시 소박하게 준비되었다. 크리스마스 아침, 마치부인이 더욱 가난한 험멜 부인의 집에 다녀와 딸들에게 묻는다. "얘들아 불쌍한 그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침을 줄래?"
본인들도 가난한 형편이지만, 불쌍한 가족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주고 돌아왔을 때, 집에는 크리스마스 식탁이 거하게 차려져 있었다. 마치 착한 일을 하고 산타로부터 보상을 받은 것처럼. (물론 산타 할아버지가 아닌 로리 할아버지의 선물이었다). 한가득 쌓아놓은 핑크빛 아이스크림, 머랭쿠키, 초콜릿 케이크, 페이스트리, 크리스마스 쿠키, 거대한 서빙 요리까지 그들의 마음만큼이나 풍요로워 보인다. 실버 3단 캔들 홀더나 케이크 스탠드, 장식용 식물들이 식탁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준다.
나는 원작소설보다 그레타 거윅이 현대적으로 해석한 이 영화가 더 와닿았다. 어린 시절 원작을 읽었을 땐 마냥 조를 동경하고 에이미를 미워했다면, 이번에는 에이미의 성장을 응원했고, 베스가 가여웠고, 메그가 안타까웠다. 모든 인물에게 나의 삶의 부분 부분을 투영하게 된 것이다.
"당신한테 너한테는 결혼이 경제적 거래가 아닐지 몰라도 나한테 그렇지 않아. 내가 돈을 벌 수 있다고 해도 내가 결혼하는 순간 그 돈의 소유자는 남편이 되고 내가 남편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 역시 그의 소유가 돼. 그러니까 내 앞에서 결혼이 경제적인 거래가 아니라는 소리를 감히 하지 마"
"나는 그저 여자에겐 마음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여자에게는 미모만이 아니라 야심도 재능도 있어요. 사람들이 여자에게 필요한 건 사랑만이라고 말하는 게 지긋지긋해요.하지만 저는 동시에 너무나 외로워요"
나의 눈꺼풀을 벗겨주는 감동적인 대사 역시 원작에 없던 페미지즘적인 대사를 만들어서 온 것이 아니라 원래 거기 있던 대사를 부각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레타 거윅은 인터뷰에서 '어떻게 각색하는 것이 21세기 여성 감독으로서 진짜 작가의 의도에 더 다가서는 길인가'를 열심히 고민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고민은 너무나 성공적이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이영화를 이렇게 평했다. "원작자 올컷보다 더 올컷 같은 재해석" 이 영화는 올바름을 강요하지도, 시대를 거부하지도, 원작을 해치지도 않는 멋진 여성 서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