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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간수집가 Aug 01. 2024

엄마의 축음기

빈티지 레코드에 빠지게 된 이유

어린 시절에는 누구의 집을 놀러 가든 큰 전축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조금은 칙칙한 금빛의 전축이었는데, 거실 TV 옆에 TV만큼 크게 놓여있었다. 지금은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나 이어폰으로 각자의 음향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에는 음악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도 커다란 전축을 사야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하나의 부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집에 TV가 몇 개 있는지, 컴퓨터가 있는지, 혹은 전축이 있는지. 처음 전축을 샀을 때는  가족 모두가 신이 나, CD와 카세트테이프를 모으기 시작했다. 엄마는 드라마 「애인」의 OST I.O.U를 내내 틀어 놓기도 했다. 언니와 나는 당시 1세대 아이돌의 CD나 길보드 테이프, 호동이와 포동이나 신동엽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자주 들었다. 지금처럼 가전기기가 쏟아지는 시대에는 구매해 두고 썩혀두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딱히 즐길거리가 많지 않던 당시에는 무언가 비싼 가전기기를 구매하면, 그것을 충분히 즐기는 취미가 만들어졌던 것 같다.

 

LP 레코드를 접한 건 훨씬 나중의 일이다. 앤티크 한 느낌이 좋다며, 어느 날 엄마가 축음기를 사 왔다. 거실, 안방으로 여기저기 옮겨가며 배치를 궁리하더라. 나도 그게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엄마 옆에서 바늘을 올리며 사용법을 익혔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엄마의 축음기에 대한 흥미는 빠르게 식어갔다. 이제 음악은 차 안에서 블루투스 스피커로 듣거나, TV 프로그램을 통해 시각적으로 즐기게 된 것이다. 대신 그 매력에 빠져, 빈티지 LP 레코드를 모으는 건 온전히 나의 취미가 되었다. 명동 회현지하상가에 가서, 목욕탕 의자에 쭈그려 앉아 몇 시간이고 낡고 오래된 레코드를 뒤졌다. 주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쾌쾌한 먼지 냄새를 맡는 것도 좋았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 온 레코드, 누가 복사한 지 모를 해적판 레코드,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레코드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덕분에 클래식은 물론 오페라, 올드팝, JPOP까지 섭렵하며 음악에 대한 잡식을 하기 시작했다. 쥐뿔도 모르지만, 그래서 더 즐거웠다. 때로는 레코드의 상태가 좋지 않아도 커버 디자인에 마음이 뺏겨 구매하는 일도 많은데, 어린 왕자 그림 커버가 예뻐서 구매한 레코드에서 불어판 어린 왕자 오디오북이 흘러나왔을 때는 너무 좋아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래. 빈티지 레코드는 역시 발견하는 재미지!


본가에서 독립을 하며, 축음기도 함께 가지고 나왔다. 내가 달라고 하지 않아도, 이미 그것은 내 것이 되어있었기에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엄마의 축음기는 우리 집 침실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다. 가끔 축음기의 먼지를 털고 빈티지 레코드를 얹는다. 치지직.. 바늘이 레코드를 스치는 이 잡음을 들으면, 꼭 레코드 녹음을 한 과거와 연결되는 것 같다. 구한말 우리나라에 처음 축음기가 들어왔을 당시, 사람들은 그 속에 작은 인간이 들어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믿었다고 하던데. 그런 귀여운 이야기를 들으면, 바늘에 치지직 거리는 이 잡음 소리도 마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간 여행의 고리처럼 느껴진다. 요즘은 '바이닐'과 '턴테이블'이라는 세련된 말로 부르기도 하지만, 왠지 내가 가지고 있는 엄마의 '축음기'에는 빈티지 'LP 레코드'라고 불러줘야만 할 것 같다. 세월이 흘러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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