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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간수집가 Aug 08. 2024

생각이 머무는 공간

앤티크 뷰로로 버지니아 울프처럼 글쓰기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의 방을 상상해 본다.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 바닥,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종이들, 너무 많이 앉아 푹 꺼져버린 1인용 소파. 그리고 구석에는 마호가니 뷰로가 자리 잡고 있다. 뷰로의 뚜껑은 항상 열려있다. 정돈되지 않은 방의 모습이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사색하고 글을 쓴다. 


나는 영국에서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여자다.
...
나는 지금 습하고 푸른 저녁노을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저녁노을은 짜증스럽고 우울한 날에 대한 뒤늦은 회한이며, 지금은 사라졌지만 틀림없이 구름은 언덕 위에 금빛으로 빛나면서 언덕 꼭대기의 가장자리를 부드러운 금빛으로 장식했을 것이다.

[울프 일기] 1925년 9월 22일 화요일, 버지니아 울프


100년 후, 한국의 어느 독자가 영국 앤티크 뷰로 앞에 앉아 [울프 일기]를 읽고 있다. 1925년, 영국에서는 한정적으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자유를 누렸지만, 2022년에는 누구나 글을 읽고 쓴다.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의 시선과 생각이 나를 또다시 감정적으로 흔든다. 

 

우리 집 거실에 한쪽에는 100년 된 마호가니 앤티크 뷰로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오래된 가구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구옥 거실에도 제법 잘 어울려주고 있다. 한껏 뽐을 내는 큰 가구들과는 다르게 수줍은 듯 조용히 자리를 잡고는, 아름다운 마호가니의 나뭇결무늬를 비춰주고 있다. 뷰로는 우리 집 분위기를 담당하고 있다. 그냥 놓여있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공기를 만들어준다.


육면체의 도형을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잘라놓은 독특한 모양의 이 가구는 오직 그것만이 가지고 있는 디자인 자체로 사람들에게 '뷰로'라고 인식시킨다. 세모난 뷰로의 뚜껑을 펼치면 그것이 상판이 되면서 비로소 'ㄴ'자 모양의 책상이 완성된다. 나무 냄새가 난다. 부지런히 오일로 닦아 길들인 수확이다. 이런 수고로움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멋스러운 손때까지 묻으면 100년 가구는 더 찬란해진다. 


뷰로의 뚜껑 밑으로는 세 개의 서랍이 있다. 3단 서랍은 감사하게도 모두 잠금장치가 있어 내부를 감출 수 있는 제법 진귀한 녀석이다. 서랍에는 책부터 종이 서류들, 문구들, 전자기기의 충전선까지 가득 감춰두었다. 술이 달려있는 이 낡은 열쇠를 돌리면 딸깍하며 잠긴다. 피아노 열쇠처럼 생겼지만, 옛날 영국에서 실제로 썼을 법한 보물상자의 열쇠 같기도 하다. 뷰로 위에는 낡은 문진, 그리고 서독일에서 온 빈티지 그릇세트, 스위스에서 온 카우벨이 놓여있다. 모두 나의 취향이 깊이 묻어나는 수집품들이다. 뷰로를 열면 감추어둔 작은 칸의 비둘기집에서 포켓사이즈와 책과 노트가, 연필꽂이에는 각종 문구용품이 채워져 있다. 


뷰로 뚜껑은 일의 온오프를 구별해 주는 고마운 존재다. 일단 일을 접어야 할 때는 뚜껑을 닫아버리면 되는 것이다. 뚜껑을 덮어 놓으면 고급스러운 오브제 가구가 되고, 뚜껑을 열어 실제로 잘 사용할 수 있는 활용적인 가구이기도 하다. 그럼 하나의 앤티크 오브제로서의 기능만 충실히 해낸다. 일을 하고 싶을 때는 기꺼이 뚜껑을 열어 자리를 잡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데스크와는 또 다른 실용가구인 것이다. 


그렇다. 뷰로는 유럽의 옛날식 책상이다. '책상'이란 물건 자체가 문맹률 높은 그 옛날에는 특권을 가진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급 가구였다. 게다가 여성이라면 아무리 고귀한 신분일지라도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운 좋게 21세기에 살고 있는 나는 100년 전 영국의 어느 작가처럼 여기서 사색하며 글을 쓴다. 대체로 아침에 일어나 노트북 모니터를 펼치는 리추얼을 하는 것이지만, 때때로 기분이 울적할 때 사색하기보다는 뷰로에 마주 앉아 스스로의 감정을 온전히 적어보기도 한다. 갑자기 피어오르는 감정 기복에 대한 즉각적인 처방법인 것이다. 지금의 감정은 어떤지... 왜 이런 감정이 생긴 것 같은지...  그 어떤 가면도 쓰지 않고 솔직하게  그냥 나의 감정을 기록하면서 생각을 인지하고 정리해 가는 것이다. 사색이라는 명목하에 부정적인 생각이 멈추지 않을 때가 종종 있는데, 차라리 감정과 생각을 쏟아내며 기록해 가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평안히 다스릴 수 있었으니까. 굳이 스스로에게 해결책을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때로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때로는 펜을 든 손으로 종이를 꾹꾹 눌러 담아본다. 기록한 것들은 두 번 다시 되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뷰로는 나의 생각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뷰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상판 나무 위에는 가죽을 덧댄 상판이 보인다. 100년 전 영국의 작가가 쓰던 만년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스크래치를 보면 이 뷰로의 오래된 역사를 알 수 있지.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듯이 흐트러진 종이 위에 만년필을 묻혀 손끝에 닿는 감각을 느껴본다. 100년 전 영국의 예술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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