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선택
아빠는 어릴 적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친할아버지는 나에게는 아주 자상하고 따뜻한, 손녀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었지만, 다른 가족들에게는 무뚝뚝하고 아주 엄한 분이셨다고 한다. 아빠는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늦둥이 셋째, 막내아들이다. 그렇지만 엄마가 말해준 어릴 적 아빠의 모습은 가정적이셨다. 아무리 두 분이 이혼을 했지만, 어릴 적 아빠가 가정적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엄마는 종종 이야기하셨다. 아직은 가부장적인 가장이 많은 시절, 아빠는 자신의 저녁을 차릴 시간에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잘 놀고 있는지 보라고 하셨다고 한다. 자신은 라면을 먹어도 괜찮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는 아무리 남이 되었다지만, 다행이라고 늘 엄마는 말하셨다. 내가 아가일 때는 아빠가 정말 애지중지하셨다고 늘 강조하셨다.
나도 그 모든 것을 부정은 하지 않겠다. 아빠가 자신이 힘든 상황에서는 나에게 못난 말들과 행위를 했지만 내가 적어도 아가일 적 잘했던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아빠가 자신이 만든 가정을 택하지 않고 이혼을 결정한 것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번 글을 쓸 때 제일 조심한 것은 두 분이 이혼한 이유에 대해 에둘러 쓰는 것이었다. 누가 잘못했는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소통이 안되었고, 이혼 그 이후 어떤 상처를 받고, 그걸 이겨냈는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러나 두 분이 이혼을 처음 말 할 때만은 짚고 넘어가자면, 아빠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에게 자유를 줄게. 아이들은 내가 책임질게. 내가 보육원에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데리고 살 테니까. 너는 자유롭게 살아" 경제적인 여권이 되는 사람은 엄마였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은 엄마가 키우게 되었다. 만에 하나 아빠의 말대로 우리가 아빠에게 가게 되었다면, 그래서 더 만에 하나로 보육원에 가게 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면, 나는 그 상황을 버티며 바르게 자라지는 못했을 것 같다. 지금보다도 더 큰 상처를 받았을 것만은 분명하다.
두 사람이 이혼을 결정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를 극적으로 말하면, 아빠가 본인이 만든 가정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버렸다는 말을 조금 유하게 표현하자면, 자신이 만든 가정을 책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자신이 만든 가정과 자신을 만들어 준 가정 중 하나를 택하셨다. 그 선택지에서 후자를 선택하셨을 뿐이다. 아빠는 자식으로서 동생으로써는 도리를 다했지만, 남편으로써 가장으로서 부모로서는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아빠를 사랑하기에, 엄마를 이해한 것처럼 아빠도 이해하려고 했다. 아빠가 자라온 환경, 아빠에게 가족의 의미, 아빠가 짊어진 삶의 무게 등을 부단히 이해하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 역할까지 해내려는 나에게 아빠는 상황도 자세히 모르면서 '말 좀 잘 들어라. 자신을 힘들게 하지 말아라'라고 훈계하셨다. 그럼 그런 생각이 자연히 들었다. '본인에게 무슨 권한이 있다고 나에게 훈계를 하지?'
엄마는 아빠가 집에 오면 오빠 대신 나를 꼭 집에 있게 했고, 오랜만에 본 아빠를 살갑게 대하면 엄마는 괜스레 나에게 히스테리를 부렸다. 종종 찾아오는 아빠는 이미지만 좋다면서 말이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아빠에게 한 번은 조금 쌀쌀맞게 굴었더니, 아빠는 자신이 뭘 잘못했냐며 케리어를 대차게 밀어버리시며 나에게 화를 내셨다. 싸운 커플 사이에 끼는 것도 힘이 드는데 이혼한 부부 사이에 낀 자녀의 상황은 정말 난처하다.
그러다가 나는 한동안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에게 아빠는 없다. 아빠는 나를 버렸다. 그래서 누군가 명절 때 물어보면 답했다. '나 아빠 없는데?' 적어도 같이 안 사니까 아빠가 집에 없는 건 사실이었다. 학교에서는 벙어리로, 집에서는 엄마의 비위를 맞추는 나에게 마음의 병이 걸리자 아빠는 왜 너는 그렇게 유별나냐고 말을 하셨다. 내가 마음의 병에 걸린 게 더 정확히는 내가 유별나진게 시작이 누구 때문인데요? 울분이 터졌다.
아빠에게 무척 화가 나 몇 해를 안 보고 산 것 같다. 장문의 편지 몇 장을 써서 오빠 편으로 보냈고, 아빠는 그마저도 표현해 줘서 고맙다고 해주셨다. 나중에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성하셨다. 무엇보다 아빠의 상황이 나아지자, 우리가 대학생이 되어도 엄마에게 꾸준히 양육비를 보내주셨다. 엄마는 늘 말하신다. 서로 틀어졌더라도 아빠가 폭행을 하는 아버지도 아니었고, 너희가 성인이 되어도 양육비까지 보내주시면서 그래도 도리를 다하신다고 말이다. 아빠는 사실 착한 사람이다. 그 점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완벽하게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흘러 아빠의 상황이 나아지자 안색자체가 좋아지신 게 눈에 보인다. 그리고 최근엔 그런 말을 하셨다. "아빠는 사실 이혼하고 나와서 혼자라 외로웠지만, 그래도 숨 트이면서 살 수 있었어." 이제와 생각하면, 누구 하나라도 자유롭게 살아서 다행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