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최선
엄마는 표현이 서툰 사람이며 화술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더 정확히는 내가 화술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늘 엄마의 표현이 적게 느껴졌던 것 같다. 엄마는 가끔 "내가 보고 배운 사랑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니?"라며 짜증을 내시기도 했다. 사실 엄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잘 못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엄마의 사랑이 있다.
고등학생 때 형편이 어려워져서 살던 집보다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전보다 멀어진 등굣길에 버스는 늘 붐비었고 그 시간을 피해 일찍 학교에 갔다. 등교 후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자는 척이었다. 일찍 등교한 다른 아이들이 교실 뒤편에 모여 아침마다 욕을 퍼부었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저런 X을 낳고도 쟤 애미는 미역국을 먹었을까?"
"저 X은 머리만 빼놓고 몸을 땅에 묻어서 골프채로 머리를 날려버려야 하는데"
이 정도의 말만 듣는다면 사실 무난한 하루였다. 시험기간에 국어책이 사라지거나 책상에 욕이 적혀있거나 의자가 사라지는 일보다는 덜 귀찮았다. 학교 생활은 나날이 지옥이어서 늘 가방에 유서를 들고 다녔다. 군인이 전쟁을 나가기 전에 쓰는 유서처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게 늘 가방에 유서를 넣고 등교를 했다.
이런 내 삶의 유일한 낙은 TV를 보는 것이었다. 밥 먹는 것 외엔 쓸 일없던 입이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밖에서 숨겨왔던 감정을 드라마를 보며 쏟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삶을 살아갔다기 보단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며, 고통의 시간을 지나가기만 했다. 그래서 현실에선 격지 못하는 인생을 경험하고 느끼며 TV 속에서 나마 살아갔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TV가 고장 난 것인지 전파가 잘못된 것인지 자꾸 멈추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하교 후 TV를 보고 있었는데, 하필 엄마가 퇴근한 시점에 TV가 완전히 멈춰버린 것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욕이라는 욕은 다해가며 울어버렸다. 그러자 엄마는 고작 TV 때문에 왜 우냐고 달랬지만 뜻대로 안 되는 삶에서 '고작' TV조차 말을 안 듣는 것이 분했다. 인생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기계조차 말을 안 듣는다니. 사소한 일이었지만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다음날 엄마는 바로 최신 TV를 사주셨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인데도 고민도 없이 딸을 위해 TV를 바꾸어준 것이다. 그게 내가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엄마의 사랑이었다.
엄마는 어쩌면 누구보다 나에게 많이 상처를 준 사람일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그녀만의 방식으로 나를 아낌없이 사랑해 주었다. 사랑을 느끼는 방식도, 표현하는 방식도 지구의 인구만큼 다양하다. 엄마가 자신의 삶에서 배운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 늘 나에게는 닿지 않았나 보다. 방식이 달라도 틀린 것은 아니란 것을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