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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의 담소 Oct 20. 2024

자기 연민에 빠진 부모와 그들의 자녀

 한때 나의 부모님은 자기 연민에 빠져있었다. 힘이 들 때면, 엄마는 팔자타령을 했고, 아빠는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왔는지를 나열하셨다. 늘 부모님의 한탄을 들을 때면 '내가 더 잘해야지, 호강시켜 드려야지, 적어도 나만은 그들의 불행 중 일부가 되지 않아야지'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가장의 역할을 해내느라, 아빠는 홀로 사시면서 외로이 버티느라, 각자의 삶의 무게를 견디고 계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나의 생활이 그들보다 좋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의 따돌림은 친구들끼리 있을 수 있는 소소한 다툼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학교폭력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지만, 나의 담임 중 한 명은 부모님의 교우관계에 대한 질문에 '그 나이 때 아이들은 다 그러고 크죠.'라는 답을 했다고 한다.


 물론 친구들이 나를 대놓고 불러서 구타를 한 적은 없었다. 집 앞으로 단체로 찾아와서 못된 말들을 쏟아붓거나, 의자나 책이 사라지거나, 책상에 욕이 적혀있던 적은 있어도 말이다. 나는 키가 컸고 딱 봐도 운동을 잘할 것 같은 학생이었기에 힘으로 덤빈다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를 때리고 싶으면 남자 애들을 불렀다.


 그중 한 일화를 말하자면, 일명 싸대기 게임이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싸대기를 맞는 게임을 체육선생님이 학교 내에 유행을 시킨 적이 있었다. 체육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싸대기 게임을 알려주자마자 나는 따돌림당하는 누군가는 맞겠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에서 덩치가 큰 남학생과 키 큰 남학생이 따돌림을 당하는 왜소한 남학생을 싸대기 게임으로 때리고 있었다. 본인들이 지면 때리라고 뺨을 내어주었지만 거기서 세게 때려봤자 더 큰일이 난다는 것을 맞는 학생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교실에 돌아오자 남학생들이 나에게 싸대기 게임을 권했다. 그 뒤로는 나를 때리고 싶어 하던 여학생들이 있었다. 거절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게임을 진행했고 정말 세게 맞았다. 귀가 먹먹한 와중에도 키득거리는 여학생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런 나에게 점심시간이라고 마음 놓을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나는 자존심이 세서, 급식실에서 혼자 밥을 먹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반에 혼자 남아 급식실에 가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점심 종이 치면, 교실 내 대형 TV 뒤에 숨어있거나 화장실에 숨어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 되면 창문에 걸터앉아 커튼을 쳤다. 마치 어린아이가 숨바꼭질을 할 때 자신의 눈에 안 보이면 자기가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커튼 뒤에 앉아있었다. 새하얀 커튼이 나를 가로막으면 바람이 불어 휘날리는 흰 커튼만 보일 뿐 아이들의 비웃음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학교에서의 생활이 지옥 같아도 나는 도망칠 수 없었다. 아빠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네가 고작 그런 것도 못 버티면 이 험난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니. 나는 밖에서 말이야 (이하생략)." 아직도 나는 이 말이 되게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견디지 못해 이혼을 하여 가정을 뒤로한 채 가버렸으면서, 나에게는 힘든 상황을 견디고 버티고 이겨내라고만 했다. 딸을 강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에서 한 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빠가 자신의 상황과 경험을 나열하는 훈계의 말 대신 나의 말을 들어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도 나는 따돌림을 버텨내며 학교를 졸업했고 무사히 대학교까지 입학했다. 그렇게 점점 부모님의 상황도 좋아지고 있었을 때쯤 일이 벌어졌다. 대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는데, 영어영문학과 정공이지만 영어로 말을 잘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머나먼 나라에 혼자 지내는 게 힘들었다. 세상에 홀로 동떨어진 기분이었는데, 와중에 힘든 일이 생겨 엉엉 울며 엄마와 아빠에게 각각 통화를 했다. 부모님은 자신들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하며 또 견디라는 말을 반복하셨다. 내가 바란 것은 그저 단순한 공감과 위로였다. 정말 힘들었다고 해서, 어럽게 간 교환학생의 기회를 내팽개쳐 버리고 올 내가 아니었다. 그냥 공감과 위로를 바란 것이었는데, 두 분은 또 자신들의 상황만 말하고 계셨다.


 나는 화가 나고 억울했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나를 우선으로 생각하며 살았던 적은 없었다. 부모님이 힘들 때는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고, 슬플 때면 위안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웃을 일 없는 나날의 연속에서 일상의 소소한 웃음을 드리고자 애교도 부리고 광대가 되어드리기도 했다. 미국에 가기 전까진 부모님을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이혼은 어른들의 사정이며, 어쨌든 엄마는 나를 먹여 살려주셨고, 아빠는 양육권을 보내주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속사정과 슬픔을 알았기에 미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 날 이후로는 가족들을 처음으로 미워하기 시작했다. 전화 이후 울화통이 터지자, 방에서 물건을 다 부시고 던지고 소리를 질렀다. 바닥에 주저앉아 울면서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내가 나를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면,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구나.

 미국에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그동안의 일들을 나열하며 내가 왜 화가 났는지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기억력이 유독 좋은 나이기에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는 나의 모습에 부모님은 놀랐으며,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봄으로써 진심으로 사과하셨다. 이 모든 일에서 방관을 선택했던 오빠 또한 사과를 했다. 현재는 시간이 많이 흘러 모두가 힘든 시절을 통과했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기 연민에 한참 빠져있던 부모님도 지금은 과거의 이야기보다 최근엔 무얼 했는지를 더 이야기 나누는 것 같다.


 나는 사람은 힘들면 누구나 모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누구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 모난 부분으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크게 상처받지 않게 하길 바란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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