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의 지원을 받으며 갭이어를 갖는다고?
IPC에서 만난 덴마크 사람들에게 '왜 폴케호이스콜레에 갔는지'를 물어봤을 때, 다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서 진로고민을 위해 갔다'고 답했다. 처음에는 '덴마크처럼 자율적인 교육을 하는 나라인데도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를 모른다고?'라는 생각에 덴마크 교육도 한계가 있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아무리 학창시절에 (우리나라보다)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자율적인 환경에서 자랐다고 하더라도, 아직 인생의 경험이 많지 않은 학생들이 단번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 진로를 결정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덴마크 교육 정책의 진짜 놀라운 점은, '진로 고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진로 탐색의 시간을 제도권 내로 편입시켰다는 점이었던 것이다.
덴마크의 교육제도 안에서 학생/청년들은 갭이어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주어진다. 에프터스콜레와 폴케호이스콜레다. 에프터스콜레는 8~10학년의 청소년들이 자아탐색을 위해 진학하는 1년간의 기숙학교다. 덴마크의 기초교육은 9학년까지이지만, 9학년을 마치고 에프터스콜레에 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에프터스콜레에서 10학년을 다닐 수 있다. 이 때는 주로 김나지움에 갈 지 직업학교에 진학할지 고민하는 시기로, 우리나라로 치면 학생들이 중학교를 마친 뒤에 1년간 기숙학교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지 특성화고등학교를 갈 지 고민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일단 여기서부터 놀랍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중학교를 마치고 너 스스로를 이해하고, 공동체 감각을 익히는 시간을 1년동안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질 지 한번 상상해보자. 1년의 자아탐색을 마친 뒤 스스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해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면,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직업 공부 포함)하는 학생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청소년기 시절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정말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열정도 많아 뭘 하든 최선을 다했었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WHY'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 지 스스로 계획해 해볼 수 있게 존중받는다면 많은 학생들은 분명 각자의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다. 덴마크 학생들의 행복도가 높은 이유를 여기서 짐작해볼 수 있다.
폴케호이스콜레는 에프터스콜레의 청년/성인 버전이다. 만 17세 이상이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기숙학교로, 덴마크 정부에서는 한 명 당 44주까지 폴케호이스콜레 등록금을 지원해준다. 덴마크 내에 70여개의 폴케호이스콜레가 있고, 내가 다녀온 IPC는 폴케호이스콜레 중 유일한 국제학교다. 서두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많은 덴마크인들은 진로를 고민하는 시기에 폴케호이스콜레에 진학한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자신에게 잘 맞는 전공을 선택하기 위해 대학을 바로 진학하지 않고 가는 경우도 많고, 대학에 가서 사회에 나가기 전에 가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 학생들도 휴학을 하고 갭이어를 갖는 경우가 예전에 비해서는 많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부터 큰 과제인데 반해, 덴마크의 학생들은 정부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갭이어를 가질 수 있다니. 참 부러운 지점이다. 국가 차원에서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것은 결국 사회적으로 청년들이 자아를 탐색하고 진로를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 걸 용인하고, 나아가 권장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또 신기한 지점은, 덴마크의 의무교육기간은 그 기간 동안 의무교육에 준하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지 그게 꼭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덴마크는 '프리스콜레'라는 단어로 묶이는 대안학교들이 많고, 홈스쿨링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물론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이 가능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덴마크는 그 선택이 훨씬 자유롭다. 프리스콜레는 발도르프나 몬테소리 등의 특정 교육철학에 입각한 학교들이 많아서, 공교육의 철학에 동의하지 않는 부모들이 주로 보낸다고 한다. 단, 프리스콜레는 비용이 100% 지원되는 것은 아니고, 75%만 지원된다고 하는데, 내가 덴마크에서 만난 덴마크의 교육 분야에서 일한다고 하셨던 분은 이 부분을 우려하셨다. 돈 있는 사람들이 점점 자녀들을 사립학교에 보내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어서, 그게 불평등을 야기할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아무리 75% 지원이라고 해도, 학비를 아예 안내는 것과 25%라도 내는 것은 꽤 다르니까. 이런 부분들은 추가적으로 고려가 필요한 것 같긴 하다. 프리스콜레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덴마크의 교육제도를 말할 때는 꼭 교육비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덴마크는 교육비에 가장 많은 예산을 들이는 나라라고 한다. 공립학교들은 대학까지 교육비가 다 무료고, 평생교육도 웬만해서 무료라고 한다. IPC에서 만났던 한 덴마크 친구는 본인은 국가에서 지원을 해줘서 등록금을 안내고 왔다는 거다! 나는 3주에 330만원이나 내고 갔는데... 너무 부러웠다. 게다가 만16세가 지나면 정부로부터 'Keep on study' 하라고 월 3천크로네씩 생활비 지원을 받는다고 하더라. 대학생이 되면 더 늘어나는데, 만 18세 이상의 공인 교육기관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SU라는 '공부하는 청년에게 주는 생활비 지원금'을 대학생 기준 월 125만원정도씩 준다고 한다. 성인학습자들은 SVU라는 '공부하는 성인에게 주는 생활비 보전금'을 주는데, 이건 성인 학습자가 기존 직장을 쉬거나 파트타임으로 줄이면서 공부할 때, 그 소득 손실을 보전해주는 제도라고 한다. 최대 40주 동안, 풀타임으로 공부하는 사람 기준 주당 약 4,700크로네 정도(한화로 따지면 주 100만원), 파트타임으로 공부할 때는 비례해서 지급한다고 한다. 그래서 고용주와 합의하여 공부 계획을 세우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 참 부러운 지점이다. 물론, 세금을 50~60% 걷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덴마크의 교육 철학의 토대를 만든 사람은 바로 '그룬트비'다. 19세기에 활동한 목사이자 교육자로, 'School for life'와 'Living word'를 강조하며 자기이해와 공동체 생활을 기반으로 한 교육철학을 덴마크 전역에 뿌리내리게 했다. 평가를 위한 교육이 아닌 '삶을 위한 교육'을 강조했기에 시험도 없고, 공동 생활 속에서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며 민주시민교육의 토대를 이루었다. 그룬트비에 대해 알아보면서, 다른 생각을 가진 한 사람이 이렇게 나라 전체를 바꿀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룬트비가 활동했을 시기는 덴마크가 계급사회에서 민주사회로 넘어가고, 전쟁에서 패한 이후라는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던 시기였기에 한 명의 사상가의 영향이 이렇게 커질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누군가의 영향이 이렇게 커지기는 어려울 것 같아 우리나라가 덴마크의 교육철학을 바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지만, 참 적시에 좋은 사람이 나타나 지금의 덴마크를 만들었구나 싶었다.
실제로 IPC에 다니면서, 그룬트비의 교육철학들을 다 직접 경험해볼 수 있었다. 이를테면, 노래를 중요시하는 것은 매일 아침 MF에서 노래를 한 곡씩 다같이 부르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으로, 공동체를 중시하는 것은 기숙학교에서 지내며 서로에 대한 존중을 중요시 여기는 문화로, Living word, 즉, 죽은 지식이 아닌 살아있는 말을 통한 교육은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쓰는 게 아니라 질의응답과 상호작용을 통해 진행되는 것으로 말이다. 특히 공동체성이 참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예를 들어 'floor ball'이라는 스포츠를 할 때도 IPC만의 규칙이 따로 있어서 '함께 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 팀에 잘하는 사람만 골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 명이 골을 넣으면 그 사람은 팀의 다른 사람들이 다 골을 넣기 전까지는 다시 골을 넣을 수 없고, 어시스트만 해야 한다는 규칙이다. 스포츠가 단순히 즐거움만을 위한 것이 아닌, 함께하는 것을 가르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느꼈다.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밥상머리교육(ㅋㅋ)처럼, IPC에서도 식사할 때 굉장히 명확한 규칙이 있었는데, 바로 모두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거다. 물론 그걸 막 인원을 한명한명 세면서까지 빡세게 하는 건 아니지만, 점심시간에는 모든 학생들이 자리를 찾을 때까지 앉지 않고 자리 앞에 서서 기다린다. 그리고 모두가 다 오면, 그날의 음식을 책임진 쉐프가 나와 음식에 대해 설명하고, 그에게 감사의 박수를 친 뒤 앉아서 먹기 시작한다. 이런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서 '함께'의 가치를 체화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덴마크 교육 철학이 바로 적용되어 모든 학교가 다 바뀌기엔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가 청년들의 '갭이어'만큼은 존중하고 권장하면 참 좋겠다. AI시대로 들어서면서 자기이해는 더더욱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앞으로는 정해진 일을 하는 사람보다 스스로 사고하고 주도적으로 일할 줄 아는 사람이 더 필요해질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뭘 잘하고, 좋아하는지,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자기이해가 되어야만 AI를 좋은 도구로 사용해 자아실현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청년들에게 직무교육, 기술교육보다도 먼저 '스스로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을 필히 보장해줘야만 한다. 자기이해를 위한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왔던 나조차도 갭이어를 가지면서 또 더 많은 걸 알게 되고, 생각이 정리된 걸로 봐서는, 학업이나 일과 병행하면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오롯이 가져보는 기간이 꼭 필요한 것 같다. 우리나라가 갭이어에 보다 친화적이어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