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으로 소득의 60%를 내는데도 행복하다고?

고신뢰사회를 만든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배경

by 파도

덴마크인들에게 높은 세금을 납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는데, 'I'm happy about it'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happy라는 단어 선택이 정말 놀라웠다. '좀 높긴 하지만, 그래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정도의 답변을 들을 줄 알았는데, 단번에 '좋다'는 답변이라니. 그는 '우리는 서로를 믿고, 정치인을 믿기 때문에 높은 세금을 내는 게 괜찮다'라고 했는데, 덴마크는 정말 고신뢰사회이고, 정치적으로 매우 투명한 사회라는 게 새삼 실감이 됐다.


IPC에서의 첫 주말에는 코펜하겐에 있는 덴마크 의회에 견학을 갈 기회가 있었는데, 놀라운 경험이었다. 일단 덴마크의 현직 국회의원이 주말에 나와 우리를 위해 의회 투어를 시켜줬는데, 소매를 걷어올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소탈하게 우리를 맞이하는 그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정장을 입고, 의전을 받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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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투어를 시켜주는 덴마크 정치인


그는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은 정치인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주민들의 대화 요청과 질문에 응답해야한다는 고충(?)도 이야기했는데(물론 본인은 그걸 즐거워한다고 했다), 주민들에게 국회의원이 이렇게나 친근하고 언제나 뭔가를 물어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게 참 놀라웠다. 잠시 만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도, 참 소탈하고 권위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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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소는 이 그림이 걸려있는 공간이었다. 왼쪽 그림은 1910년대 덴마크 의회의 모습으로, 당시에는 남성에게만 참정권이 있었기에 양복을 입은 남성들만 그려져있다. 그에 반해 오른쪽 그림은 최근 그려진 그림으로, 지난 시간 동안 덴마크 의회에 큰 영향을 미친 여성 정치인들 30명을 그린 컬러풀한 그림이다. 실제로 이 공간에 들어서면 왼쪽 벽에는 남성 그림이, 오른쪽 벽에는 여성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실제로 느껴지는 압도감이 굉장히 컸다. 현재 덴마크 국회의 여성 의원 비율은 40% 이상으로,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이며, 총리 역시 여성이다. 여성 정치인이 많다는 것도 국민들이 정치를 더 신뢰하게 만드는 요소이지 않을까? 적어도 여성 국민들의 입장에서, 나의 입장이 잘 반영된 정책이 나올 것이라는 신뢰가 생길테니 말이다.


이외에도 덴마크의 정치적 투명성을 만들어내는 요소들은 더 있다. 우선, 정당이 사설후원을 거의 받지 못하게 되어있다고 한다. 내게 이 사실을 알려준 IPC 선생님은 '만약 미국처럼 정치인이 특정 이익집단이나 기업의 후원을 받는다면, 당연히 이 정치인이 나를 대변해줄 것이라는 신뢰는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말 당연한 사실인데, 생각지도 못했었다. 정치인들이 나를 대변해줄 것이라는 신뢰는 이러한 문화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구나 싶었다.


덴마크 전문 미디어인 inside.denmark 계정에서 얼마 전 올라온 스토리를 봤는데, 덴마크 지방선거 시즌이 다가오면서 요즘 덴마크 거리는 창의적인 선거 포스터들로 채워졌다고 한다. 사진 진짜 웃겼는데... 캡쳐해두지 못해 아쉽다. 계정 운영자인 덴마크 덕후 안데르센에게 들은 바로는, 지방선거는 군소정당도 자리를 많이 차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서 더 창의적으로 홍보하는 편이라고 한다. 또한 덴마크 국회는 의원내각제에 전석 비례대표라 2%만 득표해도 원내 진출을 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번도 제1여당이 과반을 차지한 적이 없어서 정치 지형이 훨씬 다이나믹하다고 한다. 덴마크 외에도 다당제 연정 방식인 국가들이 유럽에는 꽤 있는데, 물고 뜯기가 아니라 대화와 설득이 필수적이라는 면에서 성숙한 정치문화를 만드는 데에는 훨씬 유리한 것 같다. 다당제 연정 방식의 국회는 하나의 당이 과반을 차지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권을 잡으려면 원내 과반을 차지하기 위해 연정을 이루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대화하지 않고 물고뜯기만 하면 아무리 선거에서 승리했다 해도 정권을 손에 쥐지 못하게 되니, 좌우불문 대화, 설득, 협의의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또한, 사회적 요소로도 정치적 투명성을 높이는 장치들이 존재했는데, 대표적으로는 '캐쉬리스' 문화다. 대부분 카드로 주로 결제하고, 은행에 큰 돈을 입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출처를 꼭 물어본다고 한다. 개인 간의 거래(배관공이 우리 집을 수리해준다거나 하는)도 당연히 카드로 이루어지고, 이는 탈세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뇌물을 주고받기도 어려워지고, 국가적으로 부패 레벨이 낮다 보니 부패한 자를 규탄하는 정도도 심하다고 한다. 이러한 문화는 자연스럽게 고신뢰사회를 만든다.


고신뢰사회를 만드는 문화적 배경에는 종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덴마크의 국교는 개신교인데, 그 다음 주말에 교회에 견학을 가면서 만난 목사님과의 대화에서 나는 덴마크 문화를 지탱하는 근간이 'Christianity'(기독교적 정체성)에 있음을 느꼈다. 덴마크의 많은 사회정의, 법, 복지시스템이 기독교적 가치인 '사랑, 평등, 공동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 덴마크의 문화적 기틀을 만든 그룬트비 역시 목사였다. 추정하기로는, 당시 개신교가 가톨릭의 부패와 여러 형식적 요소들에 반기를 들며 종교개혁운동을 통해 나온 것이다 보니 매우 혁신적인 요소들이 많았고, 그런 요소들이 사회정의에 잘 반영됐던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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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눴던 덴마크 목사님. 이 교회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단적인 예로, 덴마크의 경우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들이 거의 100% 정부의 펀딩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IPC 선생님 중에 소셜 에듀케이터로 활동했던 Niko라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내가 '나도 한국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는데,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의 기조가 달라져서 사업의 지속성을 확보하기가 참 어렵다'는 고충을 털어놨더니, 덴마크는 어떤 당이 정권을 잡든, 모든 정부가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가치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바뀌는 걸로 사업이 중단되는 일은 없다고 한다. 정말정말 부러웠다! 게다가 덴마크의 비영리 사업들은 정부에서 10년 계약으로 장기적인 펀딩을 받기 때문에, 매우 안정적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고 한다.


유럽에 몇 달 살며 느낀 것은, 이들이 말하는 'I'm Christian'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는 '나 유교걸이야'라는 말과 거의 비슷하다는 거다. 신앙적이라기보단 문화적인 차원에서의 기독교정신이 강하고, 그렇기에 사회나 제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에서 '사랑, 평등, 공동체'가 깊게 녹아있다. 각 개인의 고유성을 존중하는 문화도 기독교 문화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개신교인인데, 오늘날 한국의 목소리 큰 개신교인들이 신앙을 핑계삼아 차별과 혐오를 부르짖고 있는 것을 보면 참 슬프고 화가 난다. 예수님이 제일 중요하게 이야기한 건 사랑인데. 그들이 과연 덴마크의 복지제도에 기독교적 가치가 진하게 녹아있는 걸 알고도 '복지제도는 공산주의'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주 목소리 높여 외치고 싶다. 덴마크는 종교세가 있어서, 종교에 상관없이 전 국민의 세금이 교회로 가고, 그 세금을 활용해 각 교회가 목회자들의 월급을 주고 건물 유지비로 사용하는 나라다. 심지어 개신교의 시초였던 독일은 종교세가 자신의 종교에 납부되는데, 덴마크는 100% 개신교 교회로 간다고 한다. 이런 나라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전 국민의 동의를 받으며 아주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았을까? 부디 자유를 부르짖는 한국의 극우 기독교인들은 진정한 성경의 메시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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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한 나라'는 단번에 나오지 않는다. 좋은 문화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고, 그게 선순환을 일으키며 지금의 덴마크를 만들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우리도 고신뢰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문화들을 만들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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