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당해도 괜찮은 사회'의 일 문화는 어떨까?
'덴마크 사회를 이해하려면, 먼저 Flexicurity를 이해해야한다'
한 덴마크인에게 덴마크 사회에서 살아가는것은 어떤지 묻자 이런 답변을 들었다. Flexicurity는 flexible과 security의 합성어로, 유연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담보하는 덴마크의 고용정책을 설명하는 단어다. 덴마크는 복지가 매우 좋은 나라이지만, 그런 나라에 대한 편견과는 다르게 기업의 고용자 해고가 무척이나 자유롭다. 다만, 해고된 이후 그 사람의 재취업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구조조정이나 해고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기업의 고용 유연성을 확보하는 flexible과, 충분한 실업급여와 높은 수준의 재교육 지원 등을 통해 사회적 안전망을 담보하는 security의 결합을 통해서 해고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한동안 '행복' 하면 '휘게'라는 단어가 나왔던 시기가 있었을 만큼, 덴마크는 워라밸이 높고 직원 복지가 좋은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해고가 자유롭다는 정보는 이와 꽤 상반된 느낌이 아닌가.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 두 개는 상반된 게 아니라 매우 밀접하게 연계된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덴마크가 높은 복지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나라에 고부가가치를 내는 짱짱한 기업들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지난 몇 달 간 유럽을 다녀보면서 느꼈던 바에 근거했을 때, 그 나라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해당 국가의 기업들이 얼마나 견실한지였다. 덴마크는 인구 600만명의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큰 기업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레고도 있고, 음향으로 유명한 뱅앤울룹슨, 세계 최대 해운기업 머스크 등, 강력한 글로벌 기업들이 많이 있다. 기업에게 고용의 유연성을 보장한다는 것은 인건비 리스크를 줄이고, 변화하는 환경에 더욱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기업의 입장에서도 훨씬 혁신적인 도전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기업이 혁신을 통해서 강해지면 정부의 입장에서도 복지제도를 계속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고 말이다.
GPT와 함께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본 flexicurity의 기업 측면 장점은 이렇다. 기업에 고용 유연성이 담보되면 기업은 경제상황 변화에 따라 채용과 해고가 쉬워서 인건비 리스크가 감소하고, 실험적 채용도 가능하며, 해고에 따른 비용(법적 분쟁 가능성 등)도 낮다. 노동의 이동이 많아 필요한 인재를 신속히 확보할 수 있고, 기업의 상황에 따라 조직 리빌딩이 쉬워 혁신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러한 장점이 적은 인구에도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좋은 기업들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한편, flexicurity 덕분에 노동자들은 해고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정부에서는 최대 급여의 90% 수준의 높은 실업급여를 보장하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적극적인 재취업 교육을 보장한다고 한다. 또한, 덴마크는 애초에 워낙 평생교육 문화가 잘 되어 있다 보니 성인교육 체계도 탄탄하고, 사람들도 재취업 교육을 받는 것에 그다지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이직의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정부에서 높은 수준의 직업교육을 적극적으로 제공하다 보니, 숙련된 인력 공급망도 안정되어 기업 입장에서도 좋은 인재를 유치할 수 있는 기회로 연결되기도 한다.
해고당해도 괜찮은 사회는 노사간의 신뢰로 이어진다. 덴마크 사람들에게 '휘게'가 무엇이냐?고 물어봤을 때 그들이 말해준 것들은, 쉽게 번역하자면 '워라밸'과 비슷한 의미 같았다. 덴마크 사람들이 내게 들려준 바에 따르면 이들은 야근 없이 주 37시간 일하는데, 8시쯤 출근해 4~5시쯤 퇴근하고, 출퇴근 평균시간은 자전거로 15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주 40시간이기에 기본적인 일 시간은 (야근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일단 평균 출퇴근이 자전거로 15분이라는 게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내가 의성에 살았을 때 출퇴근이 자전거로 7분이었는데, 출퇴근시간 대중교통에서 시달리는 것이 나의 에너지를 정말 크게 깎아먹고 있었다는걸 그 때 체감했다. 자전거도로가 워낙 잘되어있는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평균'이 15분이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직주근접이 확보되어있다는 것일텐데, 덴마크는 아마도 주거도 안정적인 것 같다.
덴마크의 주거 안정성과 관련해 GPT와 함께 좀 더 알아봤더니, 덴마크 도시들은 15분도시 철학에 가까운 구조로 설계되어 도심-주거지역의 거리가 짧고, 도시가 소규모 분산형 구조라 생활권이 도시 곳곳에 분산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코펜하겐은 일자리의 60% 이상이 도심이 아닌 주거·상업 혼합 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주거 정책이 '도심 접근성'을 지향한다고 한다. 공공임대가 전체 주택의 20%가 넘고, 도심에도 공공임대가 공급되어 저소득층도 직장 근처에 주거를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이다. 또한 워라밸을 무척이나 중시하다 보니 사람들도 통근 스트레스를 회피하고자 출퇴근 시간을 회사 선택 시의 중요한 선택 기준으로 두고, 회사 역시 직원의 통근시간이 긴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한 국토 전체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12,000km이상 구축되어 있고, 심지어 '자전거 고속도로(Cycle Superhighway)'가 있어 근교에서 코펜하겐까지도 자전거로 30~40분이면 가능하다고 하니, 정말 자전거로 출퇴근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국가 차원에서 열심히 조성해두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이는 덴마크인의 자전거 속도를 기준으로 하기에 한국인들은 한 1시간정도 걸릴 수도 있다. 네덜란드에서 자전거타고 다닐 때 늘 구글맵 기준 시간에 x1.8정도를 해야 했던 나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정말 전투적으로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 바퀴도 엄청 크다.
이 외에도, 뽀모도로 타이머를 회사에서도 적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회사들이 45분 일하고 15분 쉬는 문화라고 해서 정말 놀랐다. 게다가 유급휴가는 매년 5주씩 지급된다. 대체 생산성을 어떻게 유지하냐고 물었는데, 일단 학창시절 교육을 받을 때부터 문제해결력을 길러내는 방식의 교육을 하고, 회사 내 평등과 협동조합이 워낙 익숙한 나라이다 보니, '책임감'을 모든 직원이 가진다고 한다. 아마 우리가 말하는 '주인의식'을 모든 직원들이 가지고 있다는 말인 듯했다. 그리고 한 덴마크인은 '7시간 안에 최대한 생산적으로 일하고, 집에 가서 가족, 친구들과 충분히 쉬고 와야 다음날도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다. 10시간 근무를 한다면 다음날 생산적으로 일하는 건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일하는 시간과 업무 성과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거다. 업무시간이 압도적으로 긴 우리나라나 일본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을 중요시하는 문화와 효율성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이러한 '휘게'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이러한 문화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물론 덴마크도 경쟁적인 직무는 있다. 변호사, 회계사 등의 돈을 잘 버는 일들이 좀 더 인기가 있고, 이런 일들은 상대적으로 압박감과 경쟁정도가 더 높다고 한다. 그러나 이걸 부모가 자녀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부모는 '자녀가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강요,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강요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대부분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래서 일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라고 들었다.
국가별 행복 순위 연구에서 보면 덴마크 등의 북유럽 국가들이 '사회적 신뢰'가 매우 높은 수준이라고 나온다. 덴마크의 '휘게', 즉 워라밸이 가능한 이유를 딱 한가지로 말하자면 이 '신뢰'가 아닐까? 노동자는 국가가 나를 실업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란 믿음, 기업은 직원들이 높은 책임감을 가지고 높은 효율성을 내며 일을 해줄 것이라는 믿음, 신뢰에 기반한 노사관계, 각 개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갈 것이라는 사회적 믿음 등등. 휘게 문화와 그로 인한 행복은 고신뢰사회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