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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어학연수] Free cooking

by 다락방

싱가폴로 어학연수를 떠나야지 결정하고 유학원을 알아보면서, 싱가폴에서 집을 구해 사는 일이 스트레스를 동반할 거란 사실을 알게 됐다. 대부분의 집이 세입자에게 요리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전자렌지를 사용한 간단한 요리만 허락한다는데, 아니 그러면 다른 학생들은 밥을 어떻게 먹나요? 라고 유학원 과장님께 물었더니, 대부분 저렴한 '호커센터'에서 밥을 사먹는다는거다.


어떻게 계속 밥을 사먹고 살지?

그런데 다들 그렇게 산다면, 나도 그렇게 살아야하지 않을까?


나는 한국교포들이 운영하는 사이트를 통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화장실이 딸린 마스터룸을 위주로 찾고 있었다. 한국에서 30평대 아파트의 안방 같은 개념이다. 그 화장실은 나 혼자 사용할 수 있는거다. 이건 좋다, 이건 포기하지 말자. 그런데 대부분의 집이 light cooking 만 허락한다는거다.


라이트 쿠킹?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라이트 쿠킹일까? 라면은 라이트일까 아닐까? 김치볶음밥은 라이트일까 아닐까? 밥을 해먹는건 라이트일까 아닐까?


그렇게 나는 마음에 드는 집들 몇개에 방을 보고 싶다고 문의를 넣었다. 내가 아직 한국에 있으니 영상이나 사진으로 집을 보여주었다. 어떤 집은 상당히 좋아보였지만, 어쩐지 가족과 사는게 불편할 것 같았고, 어떤 집은 화장실이 너무 지저분해 보였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는 잘 모르겠는데.. 그러나 집을 구해놓아야 내가 싱가폴에 입국해서 바로 거주할 수 있었다. 나는 집안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밤이면 계속 방을 찾아 헤매었다.


젊은 학생들이 어학연수를 가면 보통 기숙사나 홈스테이에서 공동으로 부엌을 사용하며 거주한다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들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게 뭐있어? 나도 이 나이에 룸메랑 살아보지, 뭐.

그렇게 저렴한 비용으로 가능한 방 하나를 계약하고자 했다. 집주인은 싱가포리언 이었다.


"나 너네집 계약하고 싶은데"


이미 내가 공부를 하러 간다는 사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소소한 대화를 나눴던 터였다. 나의 말에 집주인은


"우리 집에서는 오일리한 요리는 안돼. 계란프라이도 할 수 없어."


라고 하는게 아닌가! 그러자 갑자기 스트레스가 확 올라왔다. 계란후라이를 못한다고? 나는 이 계약을 다시 생각해봐야했다. 단순히 계란후라이를 먹지 못해서가 아니라, 계란후라이가 안되는 집에서 도대체 어떤 요리가 가능하단 말인가.


"전자렌지는 사용 가능해?"

"응, 뚜껑을 덮고 전자렌지는 사용할 수 있어."


아, 구속이 심하다. 나는 이걸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집주인에게 '나 다시 생각해볼게' 라고 말했다. 집주인은 '나 광고에 라이트 쿠킹이라고 이미 썼잖아' 해서 응 맞아, 그런데 나는 요리를 해먹고 싶기 때문에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아, 라고 말했다. 집주인은 "너가 하고 싶은건 뭔데?" 물어서 바로 떠오르는 '김치볶음밥'을 얘기했다. 앞으로 학교를 가면 도시락을 싸야할텐데, 그 때 김치볶음밥 보다 더 좋은게 또 있겠어?

그러자 집주인은 말했다.


"나 김치볶음밥 알아. 그거 만드는 거 본 적 없어. 그건 정말 헤비한 요리야!"


아?! 헤비한.. 요리야, 김치볶음밥이?


나는 그렇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정말이지, 김치볶음밥도 못해먹으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free cooking 이라고 써진 집들로 다시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자면 예산이 두 배 이상 뛰었다. 나는 세탁기도 마음대로 사용하고 싶었다. 세탁기도, 요리도 내 마음대로 하려면 예산을 더 올려야했다.


내가 이렇게 집에 돈을 많이 쓰는게 맞나? 이게 맞아? 고민이 깊어진 나에게 가족들과 식구들은 말했다.


"너 그동안 열심히 일했잖아. 그만큼 일했으면 6개월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그냥 플렉스하며 살아. 계란후라이를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지마."


그래서 나는 예산을 올렸다.

그리고 직접 집을 보고 구하기로 했다.

그러길 얼마나 잘했는지!


입국한 바로 그 날 새벽에 도착해서 오전부터 세 군데의 집을 보러 다녔다. 날은 더웠고 집을 보러 다니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첫번째 집은 그나마 가격이 가장 저렴했지만, 집주인 가족과 함께 살면서 부엌을 공유해야 했다. 그리고 사진으로 본거랑 방 컨디션이 좀 다르게 느껴졌다. 게다가 우리나라 지하철 같은 MRT 역이 근처에 없었다. 보자마자 마음에서 지웠다.


두번째 집은 MRT 역에서 가까웠고 단지 내부에 수영장도 있었다. 세탁기는 공용으로 1층에서 사용하는데, 그래 그건 괜찮았다 그렇지만 요리하는 HOB 가 너무 오래되고 낡아보였다. 흐음, 이걸로 정말 요리..를 해도 되는걸까? 내가 대단한 요리를 하는게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불안한데? 이 집은 잠깐 보류하자.


세번째 집은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이었다. 넓고 깔끔하고 세탁기도 HOB 도 다 좋아보였다. 그러나 내가 다닐 학교에서 너무 멀었다. 버스랑 MRT 를 갈아타며 다녀야했다. 하...


나는 호텔을 하루만 예약해 두었더랬다.

첫날 집을 보고 마음에 드는 집을 당장 계약해 다음날 체크아웃하고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세 집 모두 계약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는 호텔로 돌아와 다른 호텔을 급하게 며칠 더 예약해두었다. 지금 호텔보다 더 저렴한 곳으로. 나는 이제 돈을 아껴야해!!

그리고 부지런히 다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이 하는 사이트에는 마음에 드는 집이 나오지 않아 현지 부동산 중개 사이트를 이용해 문의를 넣어두고 두 군데에 예약을 잡아두었다.


싱가폴에 입국하고 둘째날, 나는 뷰잉을 예약한 집으로 향했다.

MRT 역에서 가깝다! 주변에 쇼핑몰도 있다. 게다가 무엇보다 집 상태가 너무너무 좋다. 12층에 있고 창이 넓어 도시가 한 눈에 보인다. 내가 늘 살고 싶었던 도시뷰를 가진, 그런 집이었다.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래, 이 집으로 하자!


tempImage1HcZq1.heic 내 집 창밖으로 보이는 뷰


나에게 집을 보여준 에이전트랑 계약에 대해 얘기했는데, 일단 계약서도 준비해야 하고 학생비자 발급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어야 했다. 집주인과도 얘기를 해봐야 한다고 했다. 당장 계약은 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집에 계약 의사를 표현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었다. 호텔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까봐 걱정했는데, 또 계속 집을 알아봐야할까 걱정했는데,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이틀 내내 스트레스로 가득차있다가 비로소 좀 편안해진 나는 '오늘은 글을 좀 쓸까' 하는 마음으로 그날 밤, 맥북을 들고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작은 호텔이라 따로 bar 나 cafe 가 없었다. 손님들이 즐길 수 있는 자리가 몇 개, 그리고 물과 종이컵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오늘 좀 나은 기분이 되었으니, 자, 맥주 한 캔 사들고 글쓰러 가자, 그렇게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가, 싱가폴에서의 첫 인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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