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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어학연수] Very impressive

by 다락방

싱가폴의 물가는 듣던대로 비쌌다.

내가 여행객이라면 '여행이란 이런거지' 하며 마음껏 먹고 마셨겟지만, 그러나 나는 이제 이곳에서 장기체류를 하고자 하는, 직장을 그만둔 가난한 유학생이다.

유럽 여행을 가서 좋은 호텔 로비에 앉아 비싼 와인 한 잔 마시는 호사 같은건 이제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최대한 저렴한 가격의, 그러면서도 룸 컨디션이 괜찮아 보이는 호텔에 사흘밤을 예약해두었다.

이제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 더이상 집 찾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니, 자 조금 즐겨보자. 밀린 블로그 글도 쓰고 맥주도 한 잔 하자. 나는 편의점에서 맥주를 두 캔 사서 하나는 룸의 냉장고 안에 넣어두고 하나는 가방에 넣고 맥북을 챙겨 아주 작은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호텔 로비에 사람이 그래도 좀 있겠지, 했는데 딱 한 명이 있었다. 금발머리의 외국인이었다. 아, 썰렁하네. 나는 자리를 잡고 백팩을 열어 노트북을 꺼내놓고 또 맥주도 꺼냈다. 그러자 저 쪽에 있던 금발머리 남자가 굿 아이디어라고, 내 맥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하. 마침 이 로비는 아침에 조식도 먹는 로비라 종이컵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너도 맥주 좀 줄까?' 하니 그가 좋다고 하면서 내 자리 옆으로 왔다. 나는 종이컵에 맥주를 따라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내가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그는 호주에서 왔다고 했다. 그는 내게 같은 질문을 했고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며, 그 때부터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앤드류, 그는 이곳에 친구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같이 일했던 친구가 싱가포리언인데 그를 만나러 여행왔다고. 5월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했다.


어? 나도 5월에 그만뒀는데!


5월에 회사를 그만둔 한국 여자와 호주 남자가 작은 호텔의 더 작은 로비에서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이 우연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나는 호주에 살고 있는 나의 전남친을 그는 타이완에 살고 있는 그의 전여친을 얘기했다. 좋아하는 배우에 대한 얘기도 하고 듀오링고로 외국어 공부하는 얘기도 했다. 마침 그도 듀오링고를 한다는게 아닌가! 서로의 핸드폰에 담겨있는 플레이리스트를 보여주기도 했다. 어쩌면 둘다 서로의 플레이리스트에 아는 곡이 하나도 없었다.


얘기를 하다보니 맥주가 다 떨어졌다.

마침 앤드류가 기다리던 셀프빨래방의 빨래도 다 됐다.

그는 주변의 어딘가에 가서 한 잔 더 하지 않겠냐고 물었고, 나는 세븐일레븐에서 맥주 사와서 먹자고 했다. 아주 가깝다고. 그래서 둘이 나란히 세븐 일레븐에 가서 맥주를 두 캔 사가지고 다시 호텔 로비로 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성을 듣고 정확히 스펠링을 대는 내게 "다른 사람들은 내 성을 어려워하는데 너는 정확하게 스펠링을 대네? very impressive 하다!" 고 했다.

어느덧 새로 사운 맥주도 다 마시고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로비에서 나가기 전 왓츠앱 메신저를 교환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헤어지고 내 방으로 들어왔는데, 그로부터 바로 톡이 왔다.


"지금 조금 더 함께있고 싶은데 그건 무리일까?"


나는 그에게 오늘 집 구하러 다니느라 피곤해서 안되겠어, 라고 말했다. 그는 내게 reasonable 이라고 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초라한 조식을 먹었고, 그는 어제 새벽에 일어나야 했으므로 아침을 건너뛰겠다고 했다.

tempImage63xfbz.heic 작은 호텔의 초라한 조식뷔페


나는 산책을 하다가 집안일로 변호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문서를 점검했으며 지금은 이 글을 쓰기 위해 스타벅스에 나와 있다. 그리고 앤드류로부터 톡이 왔다. 다른 호텔로 옮겨 체크인을 했다고. 우리는 어제 호텔 로비에서 만났지만, 그 날은 그 호텔에서의 나의 첫 밤이었고 앤드류에게는 마지막 밤이었다. 그는 늦은 아침을 이제 먹겠다고 했다. 뭘 먹을거냐 물으니 이 지역을 잘 몰라 아직 모르겠지만, 말레이시안 음식을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너만 괜찮다면 니가 좋아하는 식당 찾아서 얘기해줘. 내가 점심 먹으러 갈게." 라고 했더니, 앤드류로부터 답이 왔다.


"Great! I wil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레이트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그는 지금 체크인 받아준 호텔에 가방 놓고 식당 찾으러 나왔단다. 나는 서두르지 말라고 말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긴 고통의 시간 있은 후에 꿀잼이네.


그러나 그는 여행객이라 며칠 뒤면 헤어질 것이다.

나 싱가폴에 친구 하나 없는데, 와서 사귄 유일한 친구인데. 가버리네. 흑 ㅠㅠ


부동산 에이전트가 너 여기에 친구 있어? 물었는데 내가 아니라고 했단 말이지. 없었어, 그 때까지는.. 그런데 이제 하나 생겼는데 그는 이제 곧 호주로 돌아가야해. 멜버른에 산단다. 오면 베이들 다 구경시켜준다고 해서 새끼손가락 고이 걸고 약속했다. 누나가 호주 한 번 갈게.

가방 무거우면 안되니까 맥북 두러 호텔 다시 가야겠다.


앤드류가 식당 주소 보내왔다.

나는 밥 먹으러 간다.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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