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는 어떠한가
가족들은 늘 그랬다. 니 인생 네가 사는 거지, 네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거야,라고.
과연 그러했던가?
퇴사 몇 개월 전부터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나를 보며, 이게 과연 나의 문제인 것인지, 비정상적으로 내 삶을 재단하고 방향설정 하려는 가족의 문제인 것인지, 내가 걱정되는 것은 알겠으나 이것이 통제 가능한 주제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수 있는, 17년간 3번의 이직에 대해 35년간 한 직장을 다니셨을 우리들의 부모세대는 이해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다. 대체 뭐가 문제길래 어렵사리 들어간 곳을 쉽게 나오려 한단 말인가. 자, 여기서 살펴보자.
누적된 과로로 사무실에서 쓰려지기도, 약해진 면역력 탓에 일주일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끙끙 앓기도 했으며 피폐해진 정신과 마음을 회복하지 못해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느낀 적도 수십 차례였다. 명상과 달리기로 극복하기엔 한계가 있었고 그로 인해 마음의 병이 생겼다. 휴대전화로 쉴 새 없이 울리는 Slack과 Gmail의 알림을 외면할 수 없었고 이는 24/7, 365일 이어졌다. 곧 730일이 되어간다. 이것이 과연 정상인의 삶이란 말인가? 또한 이렇게 해야만 경제적 안정과 성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열심을 내었던 그 마음엔 자발적인 진심이 중요한 것일 텐데, 급여를 담보로 강요받은 헌신에 충성이 깃들긴 어려웠다. 그렇게 마음이 멀어져 갔다.
자신이 있었다.
내가 잘하는 일을 통해 나의 길을 밝히고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는 자신이 말이다. 그럴 때마다 겪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확신하느냐는 질문을 들기도 했고, 그렇다면 그런 논리라면 나는 나의 우물 안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민 채 숨만 쉬는 존재로 살아가며 그 안을 유영하는 시체와 다름없는 삶을 앞으로도 주욱 이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을 위해, 가장이나 부모의 노릇을 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희생했을 부모의 지난 삶에 대해 경외한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만약 그때 우리 부모 세대의 마음공부가, 인생에 대한 정해진 해석이 없다는 믿음이 보편적이었다면 지금 우리의 세대가 보다 자유로운 교육과 문화를 표방하는 세대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내 시절에 비해 좋아졌는데 뭘 걱정하냐는 우리들의 부모는 버틸 때까지 버티라고 말한다. 난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단 전제가 있다.
내가 그러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는, 이 버팀의 끝에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결과물을 진심으로 내가 원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보통은 이런 경우겠다. 경제활동을 통해 특정금액의 저축을 통해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을 계획하고 이행하려 한다면 버틸 수 있다. 상사와 고객들의 진상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 아니, 약간의 흔들림은 있을 수 있으나 나 스스로 넘겨버릴 수 있다. 나 또한 그랬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이런 삶이 더는 내게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그래도 버텨야 했다. 아니 버텨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나의 무의식은 언제나 내 직관보다 빨랐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나는 어제와 같은 체력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아깝다는 말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을, 난 내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허비함으로 인해 다양한 글감이 생기고 생각이 피어난다. 누군가, 어느 직장에선가 겪고 있을지 모르는 일들을 나의 시선으로 풀어낼 수 있다.
직장은 잘못이 없다. 나 또한 그렇다.
각자의 생리가 있고 길이 있다. 그 각자의 길을 맞춰야 한다고 강요받는 상황이 잘못된 것이고, 그 과정에서의 과도한 희생을 요구하는 가스라이팅이 비합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 울타리 안에서 순응하는 삶을 살고 시간을 보낸다. 그 대가로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하며 어느 정도의 문화생활과 여가를 즐긴다. 일 년에 한두 번 해외여행을 가고 좋은 경험 했으니 다시 또 달려보자 다짐한다.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자체로 가치를 느낀다면 꾸준히 정진하면 된다. 그것이 보람이고 내일의 희망이다.
그러나 내면의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운다면, 문득문득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면 그때는 한 번쯤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정말 맞는 거야?'라고.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대상은, 아님에도 흘려보낸 시간들을 피투성이가 된 채로 버텨낸 나 자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