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사람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닌, 그래서 더 다행인.

by Davca

오랜만에 술을 한잔 마셨고 다음 날 새벽 두통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았고 가벼웠다. 2025년 5월 1일의 일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나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평범하고 아주 보통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고,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지난날들의 기다림과 무용했던 자신감의 근원이 나를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자만과 오만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스스로 멈춤을 선택하고 5개월 반 가량이 지난 시점이었다.




내가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존재라는 사실은, 내가 무엇이든 해도 이상하지 않으며 더 좋은 운과 기회를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님을 의미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고 그것을 쌓아가고, 다시 기본부터 출발해서 쌓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였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내가 사회에서 받아야 하는 합리적 대우의 적당한 선이 있었다. 이토록 보통의 사람인 내가 보통이 아닌 결과를 바라는 가운데, 시도는 선별하여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나를 관찰하니 이런 상황들이 더욱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나를 망치고 있는 나의 잘못된 태도였음을 스스로 시인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난 무엇이든 했어야 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지극히 보통의 인간이었다. 존재의 고유성과 타인과의 비교우위에 있다는 특별함은 다르다. 우리 모두는, 그 누가 되었든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이다. 그 수많은 하나들 가운데 ‘나’라는 하나가 있는 것이니 지극히 일반적이고 평범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출발선의 이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내게는 중요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출발함을 인정하고, 그 이후에 덧 입혀질 과정들과 역사의 누적이 있을 후에야 나는 비로소 특별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잘것없는 팔 굽혀 펴기 10회, 턱걸이 3개, 30분 천천히 달리기, 하루 1시간 살아있는 영어 공부, 독서와 글쓰기, 금주 금연의 바른생활, 아이들과의 밀도 높은 시간. 이 모든 것들을 매일 그것도 아주 성실하게 행해야 했다. 나는 지극히 보통의 존재이기 때문에. 못할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을 해봐야 했다. 지금껏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된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더 맹렬하고 치열하게 해나가야 했다.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고 나는 늙어간다. 늙어감의 부산물이 남겨진 상황에서 후회를 덧칠하고 싶지 않았다. 아주 작은 시도, 작은 성공, 그리고 쉬지 않고 나 자신을 움직이게 하고 본질에 근접한 행동을 반복하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게 시작이었다.



나를 더 객관적으로 파악해 보기 위해 필요한 일들 중 하나는 지난 시간들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오늘을 기준으로 한 해 두 해 과거로 돌아가보는 것이다.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기억들을 기록의 끈으로 이어가다 보면 불현듯 떠오르게 되는 일들과 생각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잊었던 순간들이 이유 없이 떠오름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기록을 이어나갔다. 나라는 고유한 존재가 했던 특별했던 경험들 혹은 매우 평범한 일상들 가운데 특별했던 감정과 생각들의 나열은 지나온 시간에 대한 거룩한 찬양이었다.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는 필요치 않았다. 그 시간, 그 공간, 그 자리에서 내가 무언가를 했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이었고 그것만이 내게 남았다. 한때는 빽빽하게 들어차있었을 장면들과 생각들의 대부분은 먼지처럼 흩어진 지 오래였고 내게 남은 것은 다소 묵직한 입자들이 된 기억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기록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스스로에 대한 편향된 기억으로 특정 상황들을 미화시키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다면 사실과 생각을 구분해 보는 것이 좋겠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이 기록을 무엇을 위해 남기고 있는 것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며 무엇을 남기고자 하는 것인가.




적어도 이런 기록이 읽는 이들에게 부담스러운 의무감을 주는 거추장스러운 행위는 아니길 바란다. 또한 이런 얘기들이 언제, 어떤 형태로 타인에게 다가가 가끔은 따사로운 빛이 되어줄 수 있을지 지금의 나로선 알 길이 없기에 더더욱 의식하지 않고 나의 얘기를 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 점에 대해서도 감사한 마음이다.



*고유하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어 특유하다
*특별하다: 보통과 구별되게 다르다



얼마 전 기록의 모음들을 정리했다. 폐기했다는 표현이 좀 더 어울릴 수 있겠다. 어떤 식으로든 글을 써온 나로선 그 기록의 부산물로 남은 물건들을 보관해야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든 나를, 내 주변을 가볍게 하여 내게 중요해지는 것들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을 언제든 확보하고 있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소극적 미니멀리즘을 아주 천천히 이행하고 있는 흐름에도 그것이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다. 기억에는 추억이 있고 의미가 있다. 한 순간에 무 자르듯 정리하는 것이 가능한 시점이 올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내게는 어렵다. 그럼에도 보관의 기준을 높여, 그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은 모두 폐기했다. 다행스러운 일은 그렇게 애지중지 끼고 있던 다이어리며 책이며, 내게 중요한 것들이 사라진 지 석 달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다시 그것들을 찾거나 생각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무엇을 버렸는지 리스트를 확인하지 않으면 나조차도 잘 알지 못한다.



기록이야 그렇지만, 책은 상태와 발행 연도를 기준으로 기부, 중고판매, 폐기의 3단계로 처리했다. 책을 깨끗하게 보는 편이 아니기에 생각보다 중고로 판매한 책은 많지 않았다. 여전히 내게는 50여 권이 조금 넘는 책이 있고 이번 달 안에 마무리를 지을 예정이다. 고르고 고르고 남겨둔 책이기에 이번 작업은 이전과는 다른 고민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난 지금의 책장이 비어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책이 사라지고 난 뒤의 책장, 이 마저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 또 그만큼의 공간이 생긴다. 방을 넓게 쓰거나 배치를 바꿔 화분을 들여놓거나 하는 등의 선택지가 생긴다. 감사한 일이다. 비워낸 만큼 채울 수 있는 당연한 이치를 알아간다.


나의 평범함을 받아들이게 되면 무슨 일이든 지금보다 편한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렇지 않은 일에 대한 구분만 짓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음을 곧 알게 된다. 보통에 대한 인지와 수용은 나의 하루를 바꿀 수 있고 한 달을 바꾸고 일 년을 바꾼다. 그렇게 변화한 시간들은 보통의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나로서의 진짜 인생을 사는 것으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