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즈음으로 생각된다.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고 상견례를 마친 이후, 장모님께서 육개장을 한솥 끓여다 집으로 가져다주셨다. 예정에 없던 방문이라 경황없이 인사드리고 묵직한 육개장을 받아 들고선 '어, 어~' 하다가 잘 먹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올라왔다. 그제야 결혼도 전인데 예비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 여자 친구이자 현 아내에게 카톡을 했다. 잘 말씀드려 달라고. 이런 걸, 이렇게 받아본 적이 처음이었으니.
아내의 고향의 전라도 전주다.
나는 매번 전주 여자라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본인은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 여자라 했다.
서울 여자만 만나봤던 내게, 전주가 고향인 아내는 처음이었던 터라 장인과 장모의 본적인 전주라는 곳이 더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난 아내를 '전주여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지역, 그러니까 전라도에서는 이제 곧 가족이 될 혹은 가장 큰 선물을 해야 할 상대와 '음식을 나누거나 선물하는' 것이 가장 큰 대접이라 했다. 10년이 더 된 이야기인데 아직도 들통에 든 육개장을 생각할 때마다 신기하고도 감사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비단 장모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내의 이모, 삼촌 할 것 없이 밑반찬부터 김장김치를 주기적으로 보내주신다. 무엇보다 맛있다. 나는 다시 한번 아내를 놀렸다.
'전주 여자인 자기도 이 정도 음식은 할 줄 알잖아~'라고.
아내와 나이 차이가 있는 탓에, 장모님과 난 상대적으로 나이 차이가 적다.
결혼 전부터 밥통이 큰 예비 사위가 이것저것 잘 집어먹는 것이 좋다 하셨다. 신혼 때에도 주된 밑반찬은 죄다 처가에서 보내주신 것들이었다. 당시 은행원으로 맞벌이인 우리 부부에게 장모님의 음식은, '일용할 양식'이었다. 그중 명절 때마다, 큰 사위가 좋아한다는 육개장을 따로 해주시는 장모님의 마음은 결 따라 곱게 찢어져 먹기 좋은 모양새를 하고 있는 사태에 녹진하게 담겨있었다. 그 맛은, 깊었다.
얼마 전 장모님께서 육개장과 깻잎무침을 보내 주셨다.
최근에 날도 더워지고 하다 보니, '흰 쌀 밥에 차가운 보리차를 말고 한술 떠서 장모님 깻잎을 올려 먹었으면 좋겠다'라고 노래를 불렀다. 딱히 당기는 음식도 없다 보니 깔끔하지만 입맛 돌게 하는 뭔가를 원했는데, 장모님께서 해주시던 생깻잎무침이 생각났던 거다. 사실 여름에도 이 깻잎무침과 오이지만 있으며 식사 때 큰 걱정이 없다. 가끔 허하다 싶을 때 계란프라이 하나 해두면 족하다. 무엇이든 상관없이 장모님의 음식은 밑반찬도 때론 메인이 되는 매직이다.
사위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장모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신혼 초엔 아직 음식을 만드는 것에 서툰 큰 딸을 돕는 마음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두 아이의 엄마로 육아와 가사에 전념하는 아내는 이제 다양한 요리들을, '전주여자' 답게 잘한다. 몇 해 전 하프를 달리고 와서 오전 10시 반께부터 아내가 해준 가벼운 안주들로 밤 9시까지 막걸리와 온갖 종류의 술들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나는 먹는 즐거움이 있는 남편이고, 아내는 만드는 즐거움을 아는 아내이다. 물론 컨디션이 매우 좋았던 날을 기준으로.
그런데도 여전히 장모님은, 내가 먹고 싶어 하는 반찬을 시시때때로 만들어서 보내주고 계신다. 요즘은 그런 생각도 든다. 사실 지금 해주시는 반찬들을 사 먹을 수도 있을 텐데, 그만 고생하시고 안 보내주셔도 된다고 말씀을 드려볼까 하는. 그러나 그 말을 내 입으로 하긴 쉽지 않겠다 싶음과 동시에 그 말에 서운해하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곧 포기했다. 지금처럼 보내주시는 음식을, 그저 맛있게 먹으면 된다. 죽을 때까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닐 테니, 먹을 수 있을 때 까지라도 사양 않고 감사해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요즘은, 밖에서 육개장을 사 먹지 않는다.
내가 끌리는 장모님의 손맛을 대체할 수 있는 곳도 없거니와 가장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굳이 돈을 내고 아쉬움을 느낄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내게 장모님의 육개장은 '정의되지 않을 마음이자 배려'이다. 수 시간을 끓여내며 녹아들었을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에는 얼마간의 마음 놓임, 보고 싶은 손주들에 대한 그리움, 당신의 엄마를 생각하며 이젠 당신의 딸에게 보내는 내리사랑, 백년손님 사위에게 보내는 당부이자 부탁과 같은 얽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에 있는 힘껏 응수하려 노력하는 사위는, 장모님 마음의 아픈 손가락이었을 큰 딸 그리고 손녀와 손자를 잘 지켜내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하면 된다.
아, 어디선가 장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거 먹고,
행. 복.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