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생활부터 고객과의 점점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업무이다 보니 무리는 아니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추며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르는 이를 위해 마음에 없는 소리를 날리는 것이.
속이 곪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표피는 별 문제없어 보이나, 속에서는 고름들이 뭉쳐 지방종에 가까운 견고함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고, 어느 순간 터지게 되면 나 자신과 바라보는 이들에게 유익하지 않은 경험을 선사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참았다. 그것도 밸도 없이 웃어가며.
당시 나에게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건 사치였다.
두 아이가 어린이 집을 다닐 초기에 몇 가지 '룰'을 배웠다. 선생님들이 무언가에 대해 안내하고 '잘 알아들었나요?' 류의 질문들을 하게 되면 아이들은 '네네, 선생님~!'하고 나름의 리듬을 맞춰 대답하는 것인데, 그때 나의 상황이 그러했다. 합리적 의심과 이해의 프로세스는 접어두고 일단 대답부터 하고 봤다.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직의 성격 때문이었을까. 당시엔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친구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진상고객과 악질적인 꼰대들이 업종을 가리겠는가. 바퀴벌레는 어둡고 습한 환경이라면 어디든 존재할 수 있다. 음식 없이 한 달을 버티는 존재가 어디든 못 갈까
그땐 몰랐다. 그저 놀라 도망치기 바빴고, 행여라도 걸렸을 때는 '운수 좋은 날'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어야 했다. 그 사람과의 술자리는 유독 더했다. 친했던 이들은, '저 사람 원래 저런 거 몰라? 그러려니 하고 참아'라는 고정 멘트로 마음을 다할 수 없었던 위로를 대신했다. 그들 또한 이해한다. 직장인들이 별 수 있겠나? 주사가 있는 팀장이라 하더라도, 내일이 되면 어김없이 한 공간에 앉아있어야 하고 회의를 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며 야근도 해야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그만두는 것이었다.
'난 그냥 니가 싫어'
7년 전 그 이야기. 최악의 술자리. 누구도 못 말리던 그 사람의 주사. 빈말이라도 '니들이 고생이 많다'는 레퍼토리는 없었다. 술자리가 따끈해질 개연성이 전혀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집중 타깃이 나로 된 이유가 무엇일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나의 언행을 복기해 본 날도 숱하게 많았다. 야근을 하던 날, 다른 팀장님을 붙잡고 하소연도 했다. 사실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나의 상태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더불어 이 얘기들이 흘러 흘러 그 사람 귀에 들어가고 공공연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이슈가 되면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부조화 인간이 되어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는다고 해도, 특정 인간으로 인해 내 삶을 갉아먹는 것보다 더 낫겠다 싶었으니까. 그렇게 끝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으니까.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 사람은 말 수가 적었다. 정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시간에 그는 말수가 적었다. 가끔 수줍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지근거리에서 함께 일한 동료를 제외하고 그 사람의 이면을 본 이는 많지 않았다. 그 와중에 업무성과도 좋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동일인물을 두고 나의 해석과 조직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삼십 중반의 씁쓸했던 이야기들이 벌써 십 년 전 이야기가 되어간다. 나는 그때의 그 이 처럼 팀장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많은 부분 이해하려 노력하기도 한다. 적어도 업무의 영역에 대해서는.
상처가 되었던 그곳은 이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다. 가끔 궁금해지기도 하니까. 증오와 원망으로 가득 찬 하루로 한 해를 꽉 채우고 나는 퇴사를 했다. 온전한 나의 선택이었고, 살 떨리는 결정이었다. 사람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그것도 머리가 다 큰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해보았다. 잘해 낼 자신이 없었다. 명백히 그는 나의 고과권자 였으니. 그리고 그의 공정함과는 정면으로 배치될 기록으로 '평가'받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지옥 같던 그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비겁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당시의 나로서는 그게 유일했던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
그때의 기억을 새삼 떠올리는 것은 아픈 행위이다. 흔적 없이 사라진 그곳을 다시 파내는 것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내에게도 다시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니.
하지만 그 이후, 덕분에 새로운 경험, 새로운 패배와 좌절 그리고 성장을 온전히 체험했다. 버리고 싶은 기억으로 바꾸고 싶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새옹지마. 이로써 삶의 이치 하나를 깨닫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픈 기억이 스며드는 시점의 정의는 그냥 '아픈 것'이다.
최소한의 아픔으로 최대한의 교훈이 남는 인생이길 속 없이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