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내는 을
돈을 지불하고도 을이 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 건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인 거 같다. 살면서 그렇게 큰돈을 써본 적이 없었는데 결혼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처음이니까, 일생의 한 번이니까라는 이유를 대며 몇 백, 몇 천만 원을 썼다. 돈을 내면 그에 맞는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돈을 내는데도 을이 되는 상황이 연출됐다. 그 시작은 스튜디오 촬영이었다. 실장이라는 상담해 주는 사람이 이건 이렇게 하셔야 해요. 그건 이게 맞아요 하며 우리의 선택에 자꾸 개입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석연치 않은 기분은 촬영 후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에 약속한 것과 다른 사진 결과물을 받았지만 결혼이 임박해서, 다시 촬영하기 어려워서,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신혼집 전세 살 때였다. 전셋값과 매매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던 시절, 집주인은 전세 2년 후 월세를 요구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사 가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그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년 후 묵시적 갱신으로 동일한 조건으로 살게 되었는데 갑자기 집주인이 본인 상황이 어려우니 월세를 조금 더 받아야겠다고 했다. 당연히 수락하면 안 되는 조건이었지만 남편은 이후 전세금 뺄 때 주인의 도움이 필요하니 부당하지만 들어주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했다. 물론 전세금 뺄 때도 쉽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지사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런 상황을 많이 경험하게 되었다. 2주의 몇 백만 원 하는 조리원에서 있을 때 밤에 쉬고 싶다고 하는데도 수유를 하라는 콜이 왔다. 산모님 아이가 엄마를 찾네요.라는 이유를 댔지만 밤에 많은 아이들이 울어 감당하기 어려우니 산모들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조리원 사장에게 건의를 했지만 당장 사람을 더 뽑을 수도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산모들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산후도우미, 베이비시터에게 아이를 맡길 때도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처럼 몸도, 마음도 불편하고 돈은 돈대로 드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돈 받는 을
직장생활은 똑같은 을이지만 돈을 받는다. 물론 그 돈이 대우에 합당한 만큼은 아니며 이 월급 받고 이런 것까지 견뎌야 하나?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돈을 받는다는 이유로 내 인생의 3분의 1 이상을 내어줘야 하고 그 안에서 개인의 안녕과 의사가 얼마나 많이 희생당해야 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고 보면 조직이라는 시스템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쳇바퀴의 다람쥐처럼 뛰게 되고 그로 인해 회사라는 바퀴는 굴러가게 되어있다. 이게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든 아니든 말이다.
잠을 뒤척이다가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로또 30억이 되어서 취미로 회사에 나가는 나를 그려봤다. 모든 것의 여유가 있고 하기 싫은 일은 자신 있게 NO!라고 말하며 언제든지 사표를 던질 준비가 되어있는 나. 을의 한자는 새 을(乙)로 새가 구부리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구부리고 있어도 새는 새다. 어디든 날아갈 수 있다. 30억이 있든 없든 우리의 가슴속엔 똑같이 사표가 있고 맘에 안 들면 구부렸던 날개를 펴고 새처럼 날아가면 된다. 이곳에서 잘해봐야지, 여기가 내 평생직장이다라는 생각을 버리자. 때에 따라 이동하는 게 당연하고 잠시 쉬어가는 곳이 지금 있는 회사다. 그게 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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