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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님 Sep 02. 2024

나의 보라색 가방을 소개합니다.

my purple bag




미니멀라이프. 나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을 남기고 그것을 잘 활용하며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비우고 나니 훨씬 편하고 좋다는 것을 느끼고, 시간이 나면 버리는 일을 취미처럼 하게 됐다. 오늘은 어디를 비울까 하다가 붙박이장 한 칸을 정리했다. 택도 떼지 않은 옷, 각종 영수증, 펜 열댓 자루, 비슷한데 색만 다른 모자 등 다양한 물건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가방이었다.



친환경 에코백이라는 이유로 장 속에 자리한 크기와 모양이 같은 가방이 5개. 여기저기 기념품으로 받아온 미니 가방도 꽤 됐다. 비슷하고 공통된 것이 있으면 그중에서 가장 맘에 들고 추억이 깃든 소중한 것을 남기는 것이 기준이다. 그리고 현재에 쓰지 않고 앞으로도 쓸 일이 없는 것은 비우는 게 핵심이다. 그렇게 가방을 비우고 마음이 가벼워질 찰나, 구석에 쌓여있는 노란 헝겊을 보게 되었다. 그 안에는 보라색 키플링 가방이 골동품처럼 고이 쌓여 있었다.



팔이 긴 원숭이가 매달려 있는 천 가방인 키플링은 예전에 한 창 인기를 끌던 가방 중 하나다. 명품 가방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지만 키플링은 유행을 타는 트렌디한 보통 가방이었고 거기다가 쨍한 보라색 색감을 다시 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 미니멀라이프의 기준을 깨고 현재 사용하지 않고 앞으로도 당분간 쓸 일이 없는 보라색 키플링 가방을 다시 더스트 백에 넣어 장 안쪽에 넣어두었다.



2012년 겨울 이스탄불



때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인 2012년 겨울이다. 이스탄불을 경유하고 로마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탔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5시. 첫 차도 다니지 않는 시각이다. 오후 3시까지 스톱오버하기로 해서 시내로 가기 위해 지하철 타는 곳으로 갔다.






공항에서 지하철까지 길이 생각보다 길었다. 내 앞에 히잡을 쓴 여자가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걸어가고 있어서 초행길인 나는 그 여자를 길잡이 삼아 따라갔다. 고요한 플랫폼에 도착하자 그 여자는 멈춰 섰고 까만 눈에 동그란 얼굴이 보였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으며 인사했다. 나는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왔다는 얘기를 했고 그녀는 이집트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흔한 20대 여자 여행자들의 스몰토크였지만 으스스하게 느껴질 만한 고요한 플랫폼과 텅 빈 지하철이 무섭지 않았다. 나는 보라색 키플링 가방의 지퍼를 열어 인사동에서 산 기념품을 내리는 그녀에게 줬다. 그렇게 시작된 이스탄불 시내 여행은 알 수 없는 포근함을 주었다.





비잔틴 건축을 대표하는 아야소피아 대성당을 구경하고 그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평일이어서 회사로 출근하는 사람들과 학교로 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거기에 사는 사람이면 어떤 곳을 갈까 하다가 조그만 식당에 들어섰다. 주변 눈치를 보며 많이 시키는 메뉴 그림을 가리키며 달라고 했다. 터키에 가서 남들 다 먹는 흔하디 흔한 케밥을 먹지 않고 현지인이 먹는 메뉴를 먹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낯선 이방인으로 시작했지만 여행하는 나라의 삶 속에 동화된 멋진 탐험가가 된 것 같았다. 마지막엔 홍차도 한잔 했다. 홍차에 각설탕이 사르르 녹듯 현지인의 삶에 녹아들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형제의 나라 터키의 우애를 느끼며 즐거운 마음으로 로마행 비행기에 올랐다.



로마 테르미니역



2시간 35분 날아서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하자 오후 5시가 넘었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을 넋을 잃고 보며 30분 정도 지하철을 타고 테르미니 역에 도착했다. 역은 무척 분주하고 어지러웠지만 여행의 첫 단추를 잘 끼워서인지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지 하며 무한 긍정의 회로를 돌렸다. 역 근처에 있는 코코넛 호스텔 주인아주머니도 친절하셨고 2박 3일 동안 바티칸과 로마 시내 투어를 재밌게 했다. 20살 처음으로 혼자 해외 가는 비행기 타서 긴장해서 전전긍긍하던 내가 이렇게 여유를 가지게 되다니 어깨가 으쓱해졌다.





오늘은 테르미니역에서 피렌체로 떠나는 날이다.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플랫폼에 서 있을 때까지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기차가 서고 사람들이 모두 입구에 몰려들었다. 천천히 여유 있게 타도되는데 몰려드는 사람들에 나도 모르게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리는 사람과 타는 사람이 엉키고 좌석을 찾는 기차의 입구가 무척 혼잡했다. 열차 번호를 보고 잘 탔는데 많은 인파에 잠시 좌우가 헷갈렸다. 그때 어떤 여자가 나의 캐리어를 들고 이쪽이라면서 오른쪽으로 갔다. 나는 짐을 들고 떠나는 그 여자에게 괜찮다고 했지만 그 여자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내 짐을 가지고 가버렸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고 나의 왼쪽에서 다른 여자가 가방을 뒤지는 것을 목격했다. 나의 보라색 키플링 가방을 말이다. 키플링 가방은 주머니도 많고 옷핀으로 이중으로 잠금을 해놓고 지갑은 따로 고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안의 있는 물건을 찾기가 어려웠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한국말로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 여자는 당황하며 내 가방에서 떨어졌고 앞서가던 캐리어 여자도 나의 큰 목소리에 놀라 나를 돌아봤다. 나는 씩씩거리며 캐리어를 들고 내 좌석을 찾아 앉았다.



그렇게 좋아 보이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싫어졌다. 현지인과 내가 별다를 거 없다 생각했는데 기차역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뻔하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절망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을 때 창가에 앉아서 고요하게 책을 읽는 이탈리아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를 보자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다. 자신감이 넘쳐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오만함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소매치기당할 뻔했지만 복잡한 보라색 키플링 가방 덕분에 무사히 내 물건을 지켜냈고 다친데 없이 예정대로 나는 피렌체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됐다. 한 번의 큰 사건 이후로 아무 탈 없이 피렌체 두오모 성당도 보고, 피사의 사탑에서 사진도 찍고 베네치아에서 배도 탔다. 오랜만에 보라색 키플링 가방을 보자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훗날 키플링 가방을 메고 유럽 여행을 또다시 가는 날을 상상해 본다.




#유럽여행

#키플링가방

#테르미미역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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