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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씨작가 Sep 10. 2024

방구석 예술가가 왜 열차 작업실로 갔을까요?

1번공은 노랑





한때 나의 방 한 켠에는 대형 이젤이 자리잡고, 나는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생각해보니 꽤 오랫동안 작품을 고민하고 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한때 판화 잉크도 대량으로 구입했었는데, 그동안 잊고 지낸 세월만큼이나 물감은 굳어버렸고, 나는 그 미술 재료들을 결국 버리며 첫 작업실의 기억을 떠올렸다.


1번공 50cm 시리즈 _ sunflower _ 정아씨 _ 2023




금요일의 야간열차, woodcut, 2006년 


2006년 열차에서 드로잉 했던 내가 지금 열차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금요일의 야간열차, woodcut, 2006년



그때 나는 정직한 선을 긋고 싶었지만, 목판화는 내게 적합하지 않았다. 다채로운 색을 표현하고 싶었으나, 네 가지 기본 색으로는 만족스러운 작업을 할 수 없었다. 드로잉은 판화로 해결되지 않았고, 나는 그 미궁 속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다시 선과 색을 그리기 시작하며 클립아트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나만의 작업 스타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아이패드로 그릴 생각은 못 했던 때라 마우스로 그림을 그렸고, 덕분에 더 반듯한 스케치를 즐겨 그렸다.




그러나 이 디지털 이미지를 손으로 똑같이 옮겨 그리는 건 또 다른 도전이었다. 디지털 작업에 익숙해진 나의 손은 다시 자유로워지기까지 100시간의 작업 시간이 필요했다. 서울에서 전시한 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코엑스에서 열린 조형아트서울 페어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엄마, 그림에 손대지 마!"라며 말해봤자, 완벽하게 완성된 작업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미술 재료를 열차 작업실로 옮겼다. 어느 날, 첫째가 캔버스에 물감 놀이를 하고 신나게 빨간 손을 내밀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얼마나 물감이 궁금했을까?



나는 문고리형 열쇠 손잡이를 찾아 주문했다. 열쇠 손잡이를 교체해 본 적도 없었지만, 2019년 8월 15일, 나는 13,330원으로 고민을 해결했다. 그렇게 내 작업실 문은 잠겼고, 나는 작가로서의 세계를 시작했다. 그해에는 레지던시에도 입주해 열차 작업실에서 작업을 했는데, 왜 굳이 문을 잠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첫째의 빨간 손이 두려웠던 것이었을까?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나는 새 열차 작업실로 나왔다. 아침 일찍 아이들을 여의도로 등원시키고, 열차 작업실로 출근하는 나의 하루는 매달 100시간의 작업 시간을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의 연속이었다. 그 시간들은 잊힌 기억 속에 있었지만, 다시 떠올리니 금세 기억났다.



매일 아침 출근은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후 5시, 열차 작업실을 나와 아이들을 픽업하고, 저녁을 준비하고, 육아와 그림을 병행했다. 둘째가 어린이집에 입학하면서 시작된 작가 생활은 행복했고, 나는 그 행복을 굳게 믿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난 후, 나는 열쇠가 달린 방에서 디지털 작업을 했다. 늘 잠은 부족했지만, 낮 시간의 자유를 위해 쉬지 않았다. 두 살 터울의 아이들은 잘 잤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은 늘 감기에 걸렸고, 특히 미숙아로 태어난 둘째는 호흡기 치료가 필요했다. 감기와 싸우는 아이들을 돌보며 작업 시간을 채우지 못한 날들도 있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959 열차 레지던시 작업실에서 나는 아크릴 물감과 레진을 사용해 실험을 이어갔다. 디지털 색과 유사한 색을 찾고, 아크릴 재료를 혼합해 내가 원하는 색을 만들어갔다. 화방에서 재료를 고를 때 느끼는 설렘은 마치 장을 보는 것보다 더 행복했다. 재료가 궁금하면 장바구니에 담고, 실험하고, 배워갔다.




어느 순간, 나의 작업실이 점차 익숙해졌다. 신도림 역사를 오가는 내 길은 30분이었고, 그곳은 나의 또 다른 작업 공간이었다. 승강장에서 들려오는 열차 소리를 들으며, 14명의 작가들이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 열차 작업실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나는 그 5번 칸에서 작업하는, 작가 정아씨다.


문화철도 959 레지던시 5번방, 정아씨,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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